유익과 염려
고린도전서7장32-35
갈라디아서1장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뭔가 보통 사람이 아닌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8장을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곧 성도들은 모두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종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1장10절에 근거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사람을 좋게 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좋게 하는 삶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장가가면 마음이 갈라진다고 합니다. 세상일을 염려한다는 것이지요. 즉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염려하며 삽니다.
그런데 시집가지 않는 사람은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집가면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보니 어떤 마음이 듭니까?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살아라는 말입니까 살지 말라는 말입니까?
이건 진짜 올무지요. 결혼 하라는 말입니까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뭔가 말씀하시면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도록 만듭니다.
결혼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이 말씀에 걸려들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선수 치십니다.
올무를 놓게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판이 모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 말씀이 올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올무가 안 될까요?
본문에 보면 염려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염려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는 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 시험의 내용을 보면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것이고 둘째는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말씀대로 되는지 해보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마귀에게 절만하면 세상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염려합니까?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염려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염려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떡이 없으면 염려합니다. 그래서 몸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버는 겁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물론 이 자아는 교묘히 숨깁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괜찮은 사람처럼 행세를 하지요. 이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타인이 볼 때는 돈 염려 없는 사람처럼 행세하지요.
자신은 사장이니, 많은 월급 받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실은 밥 염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발악하며 살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교묘하게 감춥니다.
나는 그런 저급한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야만 타인이 나를 평가할 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을 이 수준으로 밖에 안 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오직 밥 먹는 염려, 즉 이마에 땀 흘려야만 땅의 소산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고 그 땅이 소산을 줄까 말까를 염려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공중에 나는 새나, 들풀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저의 집 아침이면 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그 새들을 누가 먹이고 입힙니까? 주님이 먹이시고 입힙니다. 그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누구만 염려합니까? 인간들만 염려합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준비하잖아요. 그들도 염려하잖아요라고 반박하실 분 있을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먹입니다. 그들에겐 염려가 없습니다. 도토리 준비하지 못해 굶어죽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말씀을 시험해 보자는 태도와 염려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사람은 살면서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없애려면 뭔가 신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점쟁이나 무당, 절, 교회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안, 염려해소를 위해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들에겐 기적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왕기하20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삼일 만에 병이 나아 십오 년을 더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좋아 날 뛸까요 아니면 뭔가 더 확실한 증거를 원할까요?
삼일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삼일만 지나면 병이 낫는다는데 믿고 기다릴 수 있을까요?
히스기야 왕은 삼일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당장 낫는다는 증표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 본문에서는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나게 할 이유까지는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왕 조차 말씀을 안 믿습니다. 그럴 거면 눈물로 왜 기도했습니까? 그야 염려 때문이지요.
그런데 기도 응답 받아도 염려가 사라집니까?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확실한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야 삼일동안 해야 할 근심이 사라질테니 말입니다.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나게 함으로 그 보다 더 확실한 증표는 없지요. 마치 시험합격표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말씀대로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절대로 말씀대로 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염려한다는 것이지요. 말씀대로 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염려한다고 뭔가 바뀌지가 않거든요.
히스기야가 병이 나아 바벨론 사신이 왔을 때 왕궁과 그의 나라 모든 것을 자랑삼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결국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더욱더 확고히 보여주는 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해 그림자가 뒤로 십도 가는 것과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동일한 증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지요.
나라가 망한다는 말을 들어도 끄떡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시다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나라가 망한다는 소식을 들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염려가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렸듯이 자신의 교만이 그 증표가 되기 때문이지요.
염려한다고 말씀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히스기야 왕이 울며 기도할 때 들어 주었습니까?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이 바뀐 겁니까?
아닙니다. 기도로 바뀐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 오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나게 하시고, 바벨론 사자 오게 하시고, 히스기야 왕이 자랑삼아 유대 땅의 모든 것을 보여주게 하셔서 유다나라 멸망시키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일하심에 대해 인간이 염려하고 근심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두 번째 시험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지요.
인간들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어도 말씀을 안 믿습니다. 그러니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하니 성경말씀을 이용해 먹어야 하겠지요.
세 번째는 세상권세와 영광을 차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달리 말하면 염려지요.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번민합니다. 왜 번민할까요?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 꿈이 자기 자리와 상관없는 꿈이었다면 개꿈으로 치부하고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그 꿈은 틀림없이 자기 자리와 관련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을 이야기 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 권세를 얻지 못해서도 염려이지만 얻은 권세를 잃을까 해서도 염려입니다.
그래서 그 권세를 잃게 만든다면 누구든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느브갓네살왕이 꿈을 알고 싶고 해석을 듣고 싶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것을 따로 이용하셨습니다. 짐승이 하는 짓거리가 어떤 짓거리인지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그대로 이용하셨습니다.
꿈을 안다고, 꿈을 해석한다고 느부갓네살의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염려, 걱정을 없앨 뿐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자가 고난을 당합니다. 다니엘이 고난을 당합니다.
꿈 해석 해 주면 그 다음 처후가 더 나나져야 하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오히려 풀무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죽음을 맛보게 되지요.
이 세상 판은 짐승 즉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알수록 오히려 마귀는 그 정체를 더 나타냅니다.
짐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 하나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하게 됨으로 염려 속에 빠집니다.
결혼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게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결혼은 지나가는 것이라 했잖아요.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했습니다.
성도는 결혼도 아무것도 아니고 혼자 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만을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최종 자리입니다. 천국이라는 곳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세상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 이것을 증거하는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혼하면 주님을 증거하지 못합니까?
십자가를 증거하니 결혼을 언급하는 겁니다.
결혼해서 실컷 세상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 실감하지요.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난 예수님 잘 믿는 사람과 결혼해서 세상 염려 없이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산다면 이 말씀이 그 사람에겐 필요 없습니다. 찢어 없애 버리세요. 결혼해서 염려 속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피만을,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이 지나가는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는 늘상 염려 속에 삽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반찬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든 것들이 염려하면서 행동합니다.
이런 염려하라고 주님께서 결혼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린 우리가 속한 판이 이중판 속에 끼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판과 마귀판. 그럴 때 우린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제대로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결혼하지 않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보세요. 여전히 염려합니다. 그래야만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긴다는 것과 자신의 삶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혼자 사는 인간들은 이 차이를 숨기지요. 드러나지 않지요. 결혼한 사람들은 늘 노출 되는데 혼자 사는 사람은 노출이 안 됩니다. 그러니 뭔가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마귀가 몰고 온 염려는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유익입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 올무를 놓으려고 이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린 유익이라고 하면 염려 없는 삶을 이제 살수 있겠구나라는 차원에서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익은 영생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밥 먹는 문제, 아니면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는 것, 즉 염려 없는 현재와 앞날, 세상권세와 영광을 가질 때 유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 외에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도에겐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에겐 진정한 유익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 유익이 아닙니다. 내 몸에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유익이 아닙니다. 유익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염려가운데 십자가를 통해 염려 없음으로 인도함 받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유익입니다.
그러니 마음껏 염려하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껏 주님의 피 때문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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