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43 남편 죽음

푸른 섬 2015. 6. 28. 16:21

남편 죽음.

고린도전서739-40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 큰 수로가 있었습니다. 그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 아래에 수로에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을 빼 내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항상 소용돌이가 생깁니다.

나뭇잎 같은 것을 던지면 먼 곳에 있던 것도 서서히 소용돌이에 휘말려 마지막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소용돌이치는 곳을 보면 매우 두려운 생각이 들었든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소용돌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큰 토네이도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큰 소용돌이를 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토네이도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만든 토네이도가 너무나 강력하고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자기 밖에 모릅니다. 엄마나 아빠가 힘든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몇 달 안에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임을 확고히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어 날 때부터 교육을 하면 되는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마귀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의 종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맘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곧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저 넓은 우주조차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겨 해석합니다.

 

서울대학교 최재천 교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버드 대학원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물을 전공해 보니 결국 도킨스라는 사람의 주장대로 이기적 유전자에 이용당하는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허무해지더라는 것입니다. DNA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져 들었는데 자신이 나름대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것, 그것에 의미를 둔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이란 유전자에 의해 이용당하다가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생물과학의 마지막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로 협동하면서 자기만의 것을 드러낼 때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허무하지만 자기중심으로 소용돌이를 만듦으로 그 허무함을 달래 보자는 것입니다. 그에겐 이미 허무함이라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무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는 것입니다.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그 간단한 것을 못합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꾼 꿈과 그 해석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도 않고, 여러 왕들,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 시키고 영원히 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느부갓네살 왕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그래. 영원히 망하지도 않는 나라가 온다. 이 세상은 뜨인돌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니 그 뜨인돌에 모든 것을 걸어야겠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듣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에게도 큰 상을 내립니다. 다니엘을 바벨론 제국의 모든 지혜자의 어른으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요구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도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느브갓네살의 행동을 보면 우린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대해 제대로 알고 믿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은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는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이상하고 희한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해석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대한 해석은 자기 자신을 금신상으로 만들라는 식의 해석이 나왔습니다.

 

뜨인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황금의 나라를 세운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느부갓네살 왕에게 뜨인돌은 아득한 미래일 뿐입니다. 그건 나몰라입니다. 그건 이야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가 금 신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하나님도 인정한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니엘을 높인 이유는 자신이 금신상임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주 말씀드렸습니다. 꿈을 알려 주고 해석해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자기 자리와 관련된 꿈이기 때문에 그는 발악을 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사를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뜨인 돌 조차고 자기중심으로 끌어 당겨버립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우리는 바벨론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유다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성전을 주신 것은 자신들의 축복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절대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상을 섬깁니다. 물론 여호와 하님을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뭔가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부갓네살의 행동이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있어야 하는 이유 그건 모르겠고, 이 세상은 오직 나를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자리를 빼앗기면 의미가 사라집니다.

 

멸망당하는 것은 그 때 가봐야 아는 것이고 현재는 내 의미만을 찾겠다는 것이 느브갓네살 왕의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감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로 잡히기 전의 유다가 곧 느브갓네살 왕이었다는 사실이 폭로 됩니다. 마지막엔 그 이스라엘 조차 짐승, 곧 마귀 새끼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왜 이 땅에 존재해야하는 지를 모릅니다.

언약을 주셨으면 그 언약을 위해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언약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왜 만들었는지 그 이유도 모릅니다. 자신의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우연의 산물이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만들었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출발이 이미 어떤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하루 지금 내가 행복하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자신의 소용돌이가 결정되었기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조차 자신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립니다. 그러고는 현재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면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와지니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그냥 당연한 이야기 하네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으면 당연히 남편에 매여 있잖아요. 남편에게서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당연히 내 맘대로 시집을 가든지, 가지 않든지 할 수 있지요. 주 안에서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40절에서는 바울의 견해, 즉 주님의 견해를 말씀합니다.

자기 뜻대로 시집가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주님의 견해가 중요하니 그래 시집가고 싶어도 난 재혼 하지 않고 그냥 살면 더 복된 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느부갓네살 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손안에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성도란 그렇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남편이 죽으면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죽는 사람 다시 살려 낼 수 있습니까? 썩은 사람 다시 살려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입장이 그런 입장입니다. 여기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헬라어로 잔다는 단어입니다. 잔다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죽음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라는 소용돌이를 삼키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갑니다. 즉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합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기들만을 소용돌이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고 그 소용돌이조차 빨아 당기는 주님의 피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고 남편이 죽으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슬퍼하지요.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을 보면 아버지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가족이 급 다운 됩니다. 그렇게 평화롭던 가정의 평화가 깨어 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남편의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생 남편만 의지하며 살다가 남편이 죽어 버리면 울고 불고 난리를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생 살아온 것이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소용돌이쳐 자신에게로 모여 들어야 한다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결혼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남편을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남편의 죽음을 죽음으로 보기 않습니다. 오히려 자는 것으로, 주님이 만드신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까지 남편 있음으로 인해 누구 중심으로 살았는가가 발각 됩니다. 특별한 사건이 남편의 죽음을 통해.

 

그래서 자유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 남편에게 매였던 자신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때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면 내가 진정 어디에 매여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은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주님께 매인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잠자는 남편에게 매였던 것을 다시 다른 남자에게 매이려고 한다면 매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이 구조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시집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조차 주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더 나은 남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재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주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소용돌이 속에 남은 것 하나까지도 모두 다 빨려 들어가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 났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입었습니다.

 

앞서 제가 서울대 교수를 언급했지요. 그 사람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협력하면서 성실히 살자라는 구호밖에 외칠 줄 모릅니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시작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해서 적자생존을 뛰어 넘어 서로 상생하자는 주장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라고 묻는다면 모릅니다.

 

남편의 죽음을, 그리고 재혼을 자신이 누구 소속인지를 확인하라고 한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것입니다.

남편 죽었습니까?’ ‘.’ ‘왜 죽었습니까?’ ‘병들어서, 교통사고 나서, 메르스 걸려서?’ ‘아닙니다.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니 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참 소망임을 전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라고 하면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슬퍼지도 않습니다. 또한 주님의 나라는 시집 장가 가지 않기 때문에 그 남자와는 끝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흙으로 돌아 갔을 뿐입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재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묻지요? ‘남편 죽은지 얼마 되었다고?’ 그러면 남편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을 잡니다. 잠을 자는 것을 통해 주님이 생명이요 부활이신분을 한번더 확인할 뿐입니다.

그리고 재혼은 이미 자는 자와의 관계에서 재혼하는 것입니다. 재혼하여 좋은 남편 만나도 역시 우리는 주님이 만드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재혼합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 안에서 재혼하는 것이란 소망이 재혼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재혼하여 결혼생활 가운데 자신은 자신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만드는 죄인임을 드러 내는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의 피 능력의 크심을 드러 내기 위해 재혼하게 하셨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된 삶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남편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알콩달콩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일찍 사별한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알콩달콩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병 걸리지 않고 평생 혼자 먹고 살 만큼 돈 벌면서, 여행도 다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진짜 복된 삶은 남편이 죽는 것이요, 재혼 하는 것이요, 혼자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말씀을 외곡 하는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남편이 죽으면 죽었다. 그러니 이제 자유인이니 재혼해도 된다. 재혼 할 때 주안에서 해야 된다. 그러나 혼자되었으면 혼자 과부로 사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바로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느부갓네살 같은 해석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즉 마귀새끼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다 끌어 모아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느부갓네살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금 신상을 만들어 발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와 만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하고 남편과 아내와 사별합니다. 그리고 재혼합니다. 그리고 혼자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만나는 것이 오히려 진짜 복을 받는 기회로 생각합니다. 진짜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는 기회가 바로 결혼이요 남편과 아내와의 사별이요 재혼이요 홀로 살기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평범한 삶을 살게 하시면서 우리의 삶이 누구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는 지를 확인하라고 이런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탐욕의 모든 것들을 다 꺼집어 내시면서 십자가만 바라보도록 이런 삶을 펼치십니다.

 

내가 의도한 삶은 없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만을 전하기 위해 택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절차 속에 결혼과 남편, 아내의 죽음과 재혼과 홀로 살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에 대해 성도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건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제대로 알아가게 하는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만이 더 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을 보면서 계속해서 부서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들은 말씀을 보면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더욱더 견고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