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사랑
고린도전서 8장1-6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우리가 다 지식이 있습니까? 주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상스럽게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줍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우상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고 합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어도 성도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다고 하십니다.
처음 시작을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지식을 말씀하실까요?
많은 목사들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저께 어떤 목사와 이야기 하는데 그 분도 역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날카로운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즉 많이 아는 것 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을 덕은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지식을 먼저 말씀하십니까?
어차피 이런 지식 알아봐야 교만하게 만들 것이 뻔 한데 왜 우상이란 것에 대한 지식과 참 신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줄까요?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일 사도바울이라면, 우리가 만일 주님이라면 이렇게 지식을 가진 교만한 자들이 있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야. 너희들 그런 지식 필요 없어.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 그러니 지금 너희들이 알고 있는 지식 다 지워 버려. 그러면 너희들이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들에게서 오히려 사랑이 나올 것이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지식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전체가 지식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 지식을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로마서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삶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즉 교만하라고 지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가진 올바른 지식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성경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복음에 대해, 주님에 대해 제대로 알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이들은 성경 연구를 통해 십자가의 피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내세웁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십자가만을 이야기 하면 왜 그렇게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있지요. 그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없습니다. 오직 한 하나님, 한 아버지, 한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와 같은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주님이 칭찬하신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분명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영을 받은 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 지식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오직 성도만 가질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것이 이 땅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 이 믿음이라는 것이 교만으로 작용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도무지 예상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우상은 없다.’는 것과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뭐가 나쁘며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만 있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묻겠습니다. 지식과 사랑을 함께 갖추어야 됩니까? 아니면 사랑만 있으면 됩니까?
만일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면 사랑에 대한 지식이 없이 어떻게 사랑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지식을 함유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사랑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을 나열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한 지식과 사랑을 함께 갖추라고 한다면 이것은 벌써 문제가 발생하지요. 왜냐하면 지식을 갖추는 순간 교만해지고, 그 상태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알고 있는데 안다고 해야지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상은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님이시다. 이것을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합니까? 그런데 아는 것을 안다고 하면 마땅히 알 것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까? 또한 모른다고 말하면 역시 이것도 안다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은 곧 자기 부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지식을 갖게 되면 자기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를 긍정하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태복음22장37,38절에 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곧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지식으로 가득 담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가득 담아 놓으니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들이 아는 성경지식이 잘못되었습니까?
분명 그들은 구약 말씀대로 해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시는 방법이 그들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예수님 자신을 전하는 복음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십자가를 전하는 구약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득 담겨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만 둘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해석하지 않은 자가 말씀대로 해석하는 자신들을 마귀새끼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린 예수님을 믿게 되면 더 이상 유대인들이 행하든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난 둘째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지식을 가진 교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 안에 있다는 말은 곧 ‘나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임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오직 한 주님 되신 예수님만이 주님입니다.’라고 할 때 둘째 아담 안에 있는 자이지 ‘나는 둘째 아담 안에 있어’라고 하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 있지 않다는 말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자신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상은 없다는 것을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셨다.’ 그리고 ‘한 주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도 주님이 알려 주셨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입니까 아닙니까?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그런데 그 최선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지식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만이 한 주님이시다.’라는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교만을 가져옵니다. 우상은 없다는 것이 교만을 가져 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아멘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 내 지식이 어때서? 내가 아는 말씀이 뭐가 잘못 되었어? 말씀대로 알고 있는데 왜 문제가 되느냐? 고 따집니다.
지금 주님은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고백을 그들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소유로 만들게 되니 그 고백은, 그 지식은 하나의 권력, 힘이 되었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잘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력이 되고, 힘이 되니 그 힘으로 자기 잘남을 뽐냅니다.
누가복음1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의 잘못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자가 자기를 높이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것 듣는 사람 미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사는 자를 자기를 높이는 자, 교만한 자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우상의 제물이 없다는 말씀대로, 한 주님밖에 없다는 말씀대로 사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높이는 짓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처럼 기도하면 의롭습니까?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이것 또한 지식이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똑같다는 말입니다. ‘나는 말씀대로 세리처럼 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나는 복음을 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복음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율법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그 말씀을 사랑으로 받지 않고 지식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똑 같이 말합니다. 저는 말씀을 알지만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다면 저를 낮추겠습니다. ‘저를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로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얼마나 겸손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교만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멘’이라고 하면 되는데 이것이 안 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역시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신다고 하니 이제부터 하나님 사랑해야지라고 하면 이것이 교만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 사랑하는데 너는 왜 하나님 사랑하지 않느냐가 반드시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지식을 통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를 전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지식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나의 교만과 주님의 사랑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로 사용하시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교회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늘 나의 교만이 드러나고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십니다.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강해 46 차이나는 지식 (0) | 2015.08.16 |
---|---|
고린도전서 강해 45 많은 주와 주 예수 (0) | 2015.07.19 |
고린도전서강해 43 남편 죽음 (0) | 2015.06.28 |
고린도전서강해 42 약혼 파기 (0) | 2015.06.21 |
고린도전서강해 41 염려와 유익 (0) | 2015.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