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46 차이나는 지식

푸른 섬 2015. 8. 16. 21:54

 

지식의 차별

고린도전서 87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왜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말할까요?

내 옆에 타인이 없다면 이런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와 비교대상인 타인이 옆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족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나에게도 그 부족한 부분, 미진한 부분을 채워줄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 합니다.

 

사실 인간은 위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로서 마귀의 종으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위로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위로받을 자격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나를 위로 하는 하나님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외쳐대는 것이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족한다는 말을 여기에 갖다 붙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은 자기 위로가 아닙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다 보니 도를 깨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궁핍한 곳으로 풍부한 곳으로 비천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배부름으로 배고픔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중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족한다는 말은 오히려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타인과 비교해서 나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까? 내 인생이 그래도 길거리 거지보다 나아서 말 하는 것일까요?

 

지금 내 월급이 타인이 받는 월급과 비교하니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아서 자족한다는 말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족이란 이런 수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갇혀 있습니다.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 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눈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자신은 자족하기를 배울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타인과 비교하는 자족, 체념이야 배우겠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자족은 모릅니다.

 

사도바울에게 능력 주신 분은 십자가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사도 바울과 함께 하기 때문에 고난도 받고, 풍부에 처하기도 하고 비천에 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그렇게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은 늘 죽어야 하는 자로 살고 자기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육체가 쏟아내는 죄를 체험하면서 십자가의 피만을 믿는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은 이 말씀이 삶 속에서 헤집고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풍부할 때에도, 궁핍할 때에도, 비천에 처할때도, 배부름과 배고플 때 끊임없이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란 이렇게 우리 일상생활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니 살면 살수록, 복음을 전하면 절할수록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우린 이런 반박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믿음을 주셨을 때 왜 한꺼번에 자족한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까?

성령을 주셨다면 이런 과정을 격지 않고 처음부터 자족합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삶을 살면서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난 이미 자족하니 그런 일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라고 하면 될 것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자족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주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난 이미 자족합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궁핍해도, 풍부에 처해도, 수백억을 벌어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요원합니다. 이미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또한 이런 신앙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이런 신앙을 원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이기 때문에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해야 기분이 좋지 누구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은 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후는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예수님께, 주님께, 하나님께 빌고 또 빕니다. 그래서 무얼 하겠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힘만 주신다면 내가 독단적으로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탈출이 자신들을 위한 탈출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대한 탈출 후의 인생이란 그들이 기대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들을 채워주는 삶을 고대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원망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만나 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원망 없을 때 주시면 되잖아요.

 

물 주실 것 같으면 처음부터 물 있는 곳으로 구름기둥 불 기둥이 인도하면 되잖아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 탈출 되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못살게 구시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 해 보았습니까?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했다면 더 이상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세상의 삶을 좀 깔끔하게 살아가게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현재의 우리 삶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나나 구원받지 못했다는 저 사람이나 차이가 없어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쁜 것은 오늘 말씀처럼 한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에 대한 지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나야 되는 것에는 차이가 나지 않고 차이 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 하는 것에는 차이가 나 버립니다.

 

주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에 왜 이렇게 차이나는 사람들로 모아놓았을까요?

차이 나지 않으면 완벽한 교회가 될 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가 되었던 교인이 되었던 누구가 꿈꾸는 교회가 이런 교회 아닙니까?

물론 이것도 역시 자신이 꿈꾸는 교회이기 때문에 목사는 교인들이 알아서 헌금해 주기를 바라고, 교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교회에서도 서로 필요를 알아서 도와주며 위로 해 주는 교회를 꿈꿉니다.

 

사람이 모이면 이런 꿈 안 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 차이를 발생시켰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레위 지파를 특별한 위치를 차지 합니다. 또한 레위 지파에서 아론 자손들은 제사장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땀 흘리지 않아도 다른 열 한 지파가 여호와께 드리는 십일조로 살아갑니다.

사실 여호와께서 살리시는 것인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아닌 지파사람들이 짜증 납니다. 왜 저들은 나와 다른가?

주님께서 분명 땅의 소산을 주시지만 그 소산을 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땀 흘리고 수고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이 수고의 댓가를 레위지파에서 주는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위지파도 개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함께 망했습니다.

 

그래야만 진짜 대제사장이 누구신지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는 주님에 대한 지식의 차이입니다. 지식의 차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인 교회에 지식의 차이남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몸이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조성하셨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뱃속에서부터 차이나게 만드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냅니다.

그런데 천국 갈 자도 이 차이를 통해 죄의 깊이를 끄집어 냅니다.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잘났음을 정당화 시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말씀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가 결국 하나님조차 죽이는 결과에 이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차이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자신만을 증거하십니다.

 

주님이 만드신 차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한 주님 밖에 없고 모든 것은 우상임을 아는 자가 자신에 비해 지식이 부족한 자를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차이로 인해 본인도 지옥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셨으면 차이를 없애 버리고 모두 함께 천국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모두 천국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천국을 만드신 주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린 흔히 말하는 전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도의 삶 자체를 주님의 증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린 선악과 없는 생명 나무를 원합니다. 차이 없는 세상을 원하지요.

그래서 지옥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지옥을 만드신 예수님이 그렇게도 싫습니다.

 

주님은 항상 차이를 조장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십니다.

 

바리새인 옆에 세리나 창기를 배치하십니다. 만일 바리새인 옆에 세리나 창기가 아니라 바리새인보다 더 말씀대로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다면 문제 삼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꼭 말씀을 하셔도 정말 기분나쁜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세요.

그냥 부자와 부자를 비유로 들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지 않을 텐데 이것은 누구나 기분 나쁜 거지를 천국자리로 배치했습니다.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가 천국 가는 것이 아멘 됩니까?

어느 누가 거지의 인생을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의 인생이 거지 취급 받는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취급 받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은 완벽하게 구비했는데 오늘 본문은 그 구비를 부정해 버립니다. 우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면 대우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오히려 지식 없는 자를 옆에 배치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지식이 오히려 지옥가게 만든다고 해 버립니다.

 

도대체 우리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가 되어야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 자리 마다 차이를 배치해 두셔서 우리를 십자가로 밀어 붙입니다.

우리 주변에 차이가 배치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린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과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