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48 사도됨

푸른 섬 2015. 8. 30. 19:49

 

사도됨

고린도전서 91-2

사도바울은 자신이 자유인이요 사도라고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또한 주를 봤다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행한 일에 대한 것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의 사도됨을 너희들이 주 안에서 인쳤다고 합니다.

 

이정도 되면 그 다음 무슨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사사기 10장 이하를 보면 사사 입다가 나옵니다.

입다의 출현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습니다.

 

말씀이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는데 그들을 팔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받고 팔았을까요? 여러분 어떤 경우에 판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물건의 경우 이런 표현이 가능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어떤 자로 간주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다루시는 물건, 즉 모세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생존과 삶의 번영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왜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을까요? 여호와를 버렸다고 해서 여호와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지요. 나름 제사장도 있고, 나름 제사도 드리고, 나름 에봇도 있습니다. 제사드릴 장소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이 용도를 어디에 사용합니까? 가나안 땅의 우상에 이것들을 접목 시켰습니다. 사사기628절에 보면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 제단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기드온은 바알 제단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습니까?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 때문에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를 찍어 버리라는 여호와의 명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낯에는 감히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가 자신과 아주 친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기드온을 찾아 왔을 때 하는 말을 보세요.

왜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느냐고 따지지 않습니까? 왜 우리를 버려 미디안 손에 넘겼느냐고 따집니다.

 

뭘 모릅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이스라엘이 미디안 손에 넘겨진 것이 당연해 보이지요. 그런데 기드온 눈에는 그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이 평소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여호와께 대한 원망을 갖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라고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자들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은 여호와를 믿으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듯이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교회는 가기 싫고 천주교회는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천주교를 선택한 이유는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으면 묵주 몇 번 돌리고, 고해성사 하고, 집안에 신당을 차려 놓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당신 예수 믿습니까? 당연히 예수 믿는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 자신이 우상 숭배자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자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기도와 열심, 헌신, 헌금 등이 무슨 효과가 있다고 여깁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반드시 보상해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나름 정성을 다합니다. 재물도 아끼지 않습니다. 투자 대비 수익이 엄청나기 때문에 제사장 한 사람 고용은 별것 아닙니다. 연봉 일억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억으로 자기 마음이 편하고 집안이 편하고 사업이 잘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그래야 그들이 지옥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말해 보세요. 당신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소리? 난 예수님만 믿어요. 난 우상숭배자 아니라고 합니다.

 

입자의 출현 배경이 이렇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이 블레셋과 암몬 자손들에게 팔렸습니다. 십팔 년 동안 개고생 하게 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게 범죄하였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우리 생각엔 여호와께서 알아서 구원자를 보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원자의 발생이 이상합니다.

 

암몬자손들이 길르앗을 치려고 하니 급히 입다를 자신들의 장군으로 모십니다. 물론 조건을 걸지요. 우리의 머리로 모시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암몬과 싸움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의 영이 임했는데 입다는 자기 의견을 내세웁니다.

 

만일 암몬 자손을 내게 넘겨주시고 내가 평안히 돌아오면 집 문에서 처음 나와 나를 영접하는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성신이 임했으면 성령이 임했으면 헛소리 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입다는 헛소리 합니다. 이것이 성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안 되지요. 성신은, 성령은 우리를 쪼개버립니다. 쪼개어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노출시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옵니다. 문제는 그의 집 문에서 처음 마중 나온 것이 자신의 무남독녀 딸이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을 번제물로 드립니다. 율법에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기 입의 말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딸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자신에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자손에게 원수를 갚았다고 합니다.

 

딸의 말을 잘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를 위한다면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은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번제물이 됩니까? 딸이 번제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원수가 누굽니까? 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아버지의 원수는 아버지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입다를 세워 입다 자신 즉 이스라엘 자신들이 자신들의 원수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원수가 주변 이방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이후 입다는 철이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옵니다.

왜 암몬과 전쟁할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이 말은 곧 왜 전쟁승리의 공을 너만 챙기느냐는 말입니다.

 

입다는 너희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헛소리 집어 치워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의 공은 나에게만 돌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사람들을 사만 이천 명이나 죽입니다.

 

민수기2637절을 보면 에브라임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숫자가 삼만 이천 오백 명이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시겠지요?

 

도대체 누가 누구의 원수입니까? 자신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 했기에 그 공로는 자신에게 반드시 돌아 와야 된다는 생각, 이 생각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 사만 이 천명을 몰살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죽이는 것도 모자로 이제는 이스라엘 자체를 공격하고 진멸하고 있습니다.

 

입다가 왜 이런 모습을 보입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사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겠지요. 그러나 그 앎이 그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성신의 임함이 오히려 입다의 본성을 더욱 더 노출하는 결과를 갖고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목적으로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 너의 원수는 너 자신이다. 너가 너를 망하게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망해야 마땅하다. 망하라고 입다를 사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속에서 구원자를 보여 주십니다. 입다가 구원자가 아니라 오히려 입다에게 죽임당한 번제물 된 그 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들은 오히려 구원자를 죽이는 자지 구원자 될 자격도 없고 구원받을 이유도 없고, 구원 받을 근거도 없는 자들임을 밑바닥까지 빡빡 끌거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은 어떻습니까?

마치 나 잘났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로 목사들은 나 잘 났으니 나 대우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뒤 구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신도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은 자신들이 목사인 것이 마치 입다처럼 뭔가 행세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자신들은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입다가 어떤 처지였습니까? 비류였습니다. 본류에서 쫓겨나서 마치 노숙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물론 노숙인 중에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니었죠. 그가 보여주는 행위는 그 땅 사람들이 섬기는 그모스와 일심동체입니다. 그모스 숭배는 왕국시대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성신이 임했습니다.

 

성신이 임하니 죄가 쏟아져 나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입다를 보면서 성령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죄를 쏟아 내라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받은 자들은 자기 의를 쏟아 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 대우를 받아야 돼. 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복 받아야 돼.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 자녀가 성공해야 돼.

성령이 없는 자들은 모든 것이 자기 공로로 인하여 결과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로가 있으니 무언가를 행세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누가 죽습니까? 딸이 죽습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이런 축복이 임합니다. 이런 축복은 아무나에게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또 자기 본성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은 미워하는 아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남편이 죽고, 재산 날리고 해도 우리는 죄를 쏟아 냅니다.

 

그렇다고 딸이 오래 살고 성공하고 돈 많이 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자기 공로밖에 모르는 죄가 쏟아져 나오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도 아닌 자들은 동일한 죄를 쏟아 내지만 십자가를 모릅니다.

 

암몬 자손들이 그모스를 섬겼지요. 그런데 그들이 입다에게 망해도 망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그모스를 더 열심히 섬길 뿐입니다. 그들이 잘 사는 이유도 모릅니다. 죄가 숙성하도록 잘 살게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헌신과 열심과 기도와 자녀 희생을 통한 축복이라 여깁니다.

 

마태복음2531절이하 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들의 특징, 즉 천국 가는 자들의 특징은 모른다.’ 입니다.

그런데 염소의 특징은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생각에는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천국 간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천국 간 사람은 전혀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 주님이 칭찬하실 때 몰라요.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은 행한 것이 많아요. 그러니 천국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자신이 지옥갈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기드온이 왜 우리가 이런 꼴 당해야 됩니까라는 분노와 같습니다.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이 어떤 자인지 몰라요.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있어야 하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들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에 신당을 차려놓고 기도하고 향 올리고 밥 올리고 떡 올리고 난리 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안 그런 줄 아십니까? 꼭 십자가 하나 걸어 놓고 그 십자가 밑에서 기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안한 나를 달래어 줄 분은 예수 밖에 없고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완전 역전되어 나오는 현상이 난 이제 구원 받았다. 난 목사다. 난 장로다. 난 복음을 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도찐개찐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결국 자기를 위해 살 뿐인데.

 

주님이 성도를 자유인으로 불렀습니다. 그 자유인 속에 사도가 들어가고 목사도 들어가고 모든 성도들이 여기에 포함 됩니다. 그 자유인은 자신을 파괴하는 쪽으로 가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죽으려고 하지 않고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지금도 피 흘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