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7

푸른 섬 2015. 11. 15. 14:59

 

본보기가 된 광야 이스라엘

고린도전서105-13

다니엘 7장을 보면 짐승이 나옵니다.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부니 바다에서 큰 짐승 넷이 나왔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들은 땅을 지배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권세로 예수님을 죽입니다. 물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린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우린 상상을 합니다. 우리도 짐승에게 죽어야 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첫째 아담이 범죄한 후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항상 오류입니다.

우린 짐승을 상상하고 그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성도를 상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누굽니까?

본디오 빌라도와 그 일당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당들 속에 내가 들어갑니까 들어가지 않습니까?

 

우린 당연히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호세아 110절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에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에서 선행되는 일은 먼저 내 백성이 아님을 먼저 선 보인 후 자기 백성을 만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지? 달리 말하면 너희들은 마귀 새끼들이지? 이것을 확정해 놓고 자기 백성을 만드시기 위한 작업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만드시는 작업에 내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예수님을 죽인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천년 전 사건에 어떻게 내가 함께 했다는 것입니까?

내가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건을 다시 일으키시지요. 그 사건을 적용한다고 하면 실제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현재적 사건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 사건이 됩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본보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리들의 본보기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보기라고 하면 그 다음 우리들이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자녀가 거짓말 했다. 그러면 본보기를 매를 들 수 있지요. 그러면 그 다음 그 자녀가 거짓말 하지 않겠지요.

어느 부모가 그 다음도 거짓말 할 것이고 생각하면서 매를 들겠습니까?

 

매를 들면서 하는 말이 너는 또 거짓말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 매를 들 것이다라고 하면서 매를 드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거짓말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한 일을 우리들의 본보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린 당장 생각해 내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멸망당했는가를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본보기라면 우린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악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대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면서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 음행 하지 말라, 시험하지말라,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된다고 합니다.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광야에서 일어난 네 가지 사건을 7절에서 10절까지 나열해 놓았습니다.

사건의 내용은 하나는 우상숭배, 다른 하나는 음행, 다른 하나는 시험, 다른 하나는 원망입니다.

이러다가 멸망당했으니 우린 우상숭배하지 말고 음행 하지 말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상숭배 하다가 멸망당했고, 음행하다 멸망당했고, 시험하다 멸망당했고, 원망하다 멸망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상 숭배한다면, 음행한다면, 시험한다면, 원망한다면 언제든지 멸망당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나를 위한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본보기가 있어도 우리에게 그 본이 영향을 미칩니까 못 미칩니까? 전혀 못 미치지요. 오히려 그 본을 보면서 우린 날마다 무엇과 만나게 됩니까?

 

주님의 심판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심판과 만난다는 말은 구약 사건이 우리들이 인식하는 그런 본보기가 아니라 지금 그 사건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본보기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심판과 만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자라는 말입니까?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짐승만이 주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짐승 아닌 자는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런 겁니다.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린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받았고 우린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린 구약 이스라엘 자손들과 달리 뭔가 다른 특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시험에, 음행의 시험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은 받지만 그런 시험은 항상 만점 받아 넉넉히 통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마음에 드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을 우리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은 주님의 시험통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관심은 온통 내 몸에 일어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몸 섬기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통해 나를 얼마나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실까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음행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형상 만들지 않았다고 시험 이겼다 하고, 우상제물 먹지 않고 믿지 않는 자와 음행하지 않았다고 시험 이겼다고 합니다.

 

자신을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간절히 기도도 하지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가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믿음 좋은 사람인가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자기 자랑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자들이 우상숭배 하지 않은 자들이 아니고, 음행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은 자들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기준으로 우상숭배하지 않았다고 하고 음행하지 않았다고 하고, 시험하지 않았다고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자랑은 자기 자랑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사의 일을 삼십년 사십년 했다고 칩시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면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겠습니까?

교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지요. 교사생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자랑하겠다는 말입니다.

 

목사로 삼십년 사십년 복음을 전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가 아니라면 결국 자신이 목사로서 살아온 자기 인생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자기 자랑입니다.

 

유치원 학부모를 보면 자기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자식 이야기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랑하기 바쁩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부모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자식을 키우고 직장생활하고 목사를 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 지켜놓고 하는 말이 주님을 위해서 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 한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 자랑은 십자가만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을 보는 시각도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해석하는 식의 성경해석이 아니라 주님의 해석으로 사도바울의 해석으로 해석하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사도바울이 구약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으로 해석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석해야 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오히려 우리가 어떤 자임을 말씀 하시는고 하면 우린 멸망당해야 하는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해당사항 없는 사람 있습니까?

선줄로 생각한다면 그는 곧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았으니 선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지도자 모세가 부재합니다. 그러니 애간장이 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야지요.

 

그저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치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로부터 상처를 입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 와서 하는 말이 그 아이를 내 보내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협박을 해 왔습니다.

한 주먹 하시는 분이라고 스스로 밝히면서.

 

여러분들이나 남의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들리겠지요.

 

영화에 보면 돈을 얼마 주지 않으면 네 딸을 죽이겠다고 하잖아요. 그렇데 어떤 마음 들겠습니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암에 걸렸다. 그러면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다라고 할 사람 있을까요?

그런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이 메시아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우린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육을 발산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새 피조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일에 참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곳이 광야길입니다. 광야길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겐 우상숭배, 음행, 시험과 원망이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그 속에서 우린 우리 자신의 본성을 확인합니다.

 

내 자신이 짐승임을. 내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임을 확인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감당할 시험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린 극복이 시험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셔서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하셔서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늘 음행하게 하셔서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늘 원망하게 하셔서, 늘 시험하게 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피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광야에서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그 일을 그대로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더 높아 질 것입니다.

 

그 주님만 자랑하라고 우리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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