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성도
고린도전서10장14-22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들은 다름 아닌 사람이 원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을 못 벗어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여러분이 망해 봐야 된다고 설교 했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설교가 귀신의 설교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자신은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마귀에게 속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주님께 속했다는 전제하에 설교를 듣게 됩니다.
여러분 망하면 예수님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욥이라는 인물이 나오지요. 욥이 망했지요. 그런데 욥이 망하는 것은 그가 문제가 있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망함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망해야 예수님을 찾는다는 말은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일까요?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예수일까요 아니면 십자가의 길을 제거해 주는 예수일까요?
이스라엘이 망했지요. 그들이 망했을 때 찾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신들의 행위의 의로움을 근거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한 것은 남들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남들 위해 군림했고 잔치집에 가면 항상 윗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망한다고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이스라엘도 그러 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망하나 망하지 않으나 변함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권세 때문입니다.
공중권세잡은 자의 종노릇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이방인이 하는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이 아니라 악한 영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이 하는 제사는 마귀와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이와 달리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입니다. 이것을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 제물을 먹을 때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도 역시 육신을 따라 난 자요 이방인들도 역시 육신을 따라 난 자들인데 그들의 행위가 어디에 참여하는 행위인지 보여줍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의 누구 소속인가를 그들의 행위를 통해 보여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 소속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들은 무엇을 보여 주겠습니까? 육신에 속한 자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보여 줍니까? 나머지 모두이지요. 이들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성도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성도는 육을 갖고 오직 피만 전했지 육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서 제가 행위를 통해 그들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했지요. 그 행위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 앞에 부정당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십자가만 자랑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행위의 특징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임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과 교제한다는 자들에겐 이것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의 행위가 의롭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난 이방인의 제사와 관련 없어. 난 제사 지내지 않아라고 해 버리면 오늘 본문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런 태도 자체가 바로 악령과 교제하는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9장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제가 언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질문하는 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한다고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답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갖고 있는 답을 모르실리 없지요.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 다음 것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다시 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지키고 있다는 입장에서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해석은 이들이 그동안 전혀 생각도 못한 해석을 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모세율법의 본래 뜻은 음행한 이유 외에 너희들이 이혼 증서를 주어 아내 내어버리는 것을 통해 너희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이혼 합니까?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혼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격 맞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용지물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혼의 합당한 이유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요. 마치 누구처럼.
예수님을 시험하는 유대인처럼.
예수님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음행하면 이혼해도 되지요?
결정은 다 자신이 내려놓고 성경 말씀 가져와서 합당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음행했으니 내가 이혼한 것은 말씀대로 한 것이지요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할 때 자신을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시면 제가 얼마든지 그 말씀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이 무엇과 연결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자는 간음함이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제자들이 너무 극단적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왜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까?
제자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이 율법을 범하는 원인부터 제거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잖아요. 제자들 머리 좋지요?
물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질문을 하는 자나 이 질문을 듣는 자나 이 본문을 보는 자 모두를 한 통속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말하니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해 또 대답을 해 주십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제자들은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결혼 안하면 이혼이라는 율법에 걸려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으로 답변을 하십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좋게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그래. 너희들 생각이 참으로 가상하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너희들이 생각한대로 그 율법에는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를 말씀하시면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나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나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단지 그들은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말과 행위만을 드러낼 뿐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율법을 어기지 않고 살수 있는가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을 읽는 자들은 제자들을 뛰어 넘어려고 합니다.
그래 난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겠어. 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겠어. 그래서 이혼이라는 율법을 범하는 일을 처음부터 없애 버리겠어. 그래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그대로 두지 않고 따 먹음으로 더 이상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이 작용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이런 식의 행위를 통해 드러냅니다.
왜 예수님께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무시합니까?
언제나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두고 마귀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냥 예수님 앞에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뭔가 자꾸 할 수 있다고 덥빕니다.
마귀의 종임을 이런 식으로 티를 팍팍 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들입니까?
육신을 따라난 자가 주님의 피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입니다. 주님의 피에 참여한다는 말은 자신은 늘 육신을 따라 난 자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은 다른 권세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돈 벌면서, 자식 키우면서, 여행다니면서, 축구하면서, 야구 보면서 마귀의 권세를 만나야 합니다. 제가 만나야 한다고 표현했지만 마귀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멸시하는지를 온 몸으로 마주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곳에서 성도는 십자가의 피를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주님을 노여워 하게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성도는 어떻게 살아도 주님의 피에 참여하는 자로 주님께서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14절에서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하면 우린 간단히 생각하겠지요.
그래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면 되지.
주님이 우상숭배 하게 하셔서 피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합니다.
성도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별개로 나의 독립적인 행위가 나오면 안 됩니다.
나의 모든 행위가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보다 강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1장6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성도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만들어 내십니다.
주님의 피에 참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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