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0

푸른 섬 2015. 12. 6. 14:09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고린도전서 111

첫째 아담이 받은 첫 번째 유혹은 모방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처럼 살아라는 말이 아닙니까?

 

많은 목사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범죄한 첫째 아담의 사고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반드시 죽는 일이 발생했지요. 어떻게 죽었습니까?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죽음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제대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는 죽음은 진짜 죽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육신이 죽는 첫째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인 둘째 사망이 진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린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떠 올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삼년동안 다니면서 많이 보고 배웠고 실천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으로 낳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예수님과 다른 세계를 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겉모습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출발점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들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마다 자신들은 그 가르치심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생각했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귀신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얼마든지 살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모든 일이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한 일이란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죽어야 보여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일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십자가를 근거로 한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살아서는 결코 예수님을 본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자신들은 지금 살아 있고, 살아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산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어떤 삶입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예수님처럼 산다고 하는 자들, 육으로 난 자들이 예수님처럼 산다고 할 때 그들이 내어 놓는 것은 자신들의 행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행함이란 가치 있는 행함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병들어 죽게 되는 가운데 처할 수도 있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다든지 아니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눈다든지 아니면 십일조를 빼먹지 않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루에 성경 다섯 장을 빼먹지 않고 읽는다든지, 아니면 성경구절을 달달 외운다든지, 아니면 착하게 산다든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를 내지 않는다든지 설교한다든지, 성경 가르친다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행위들을 했을 때 이들은 이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곧 사도 바울의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에스겔2025절에 보면 참으로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율례와 능히 지키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율법은 선합니까 선하지 않습니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지키라고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에스겔2025절에서는 선하지 못한 율례와 지키지 못할 규례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것을 인정하면 얼마나 간단한 일입니까?

 

문제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선하지 못한 율례로 만들었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능히 지키지 못했지만 저는 말씀을 능히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로 나오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제가 바리새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바리새인의 해석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라고 하니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면 누구를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을 본받아 산 자신을 자랑하겠습니까?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씀을 볼 때 죽은 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보지 않고 산 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주장을 펴는 이상 말씀은 선하지 못한 말씀이 되고 지킬 수 없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반대로 말씀드렸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말씀을 선한 말씀으로 보고, 지킬 수 있는 말씀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나오지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과거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나는 늘 죽는 자로 드러나면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가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41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여러분 이 말에 어디가 문제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을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문제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 아닙니까?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꼭 이런 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합니까?

좋게, 쉽게, 알아듣게 잘 가르치셔 예수님을 잘 믿도록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역할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지 한 사람 구원하여 천국 보내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자만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역할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시지 않는 자는 지옥 보내는 것이 주님의 역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정체를 반드시 드러내고야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마귀에게서 났습니다. 여러분에게서는 거짓말만 나옵니다고 하면 기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음란한 자들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 지금 복음 알고, 십자가 알고, 예수님 잘 믿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거짓말쟁이요, 음란한 자인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나이가 오십도 안되었는데 이런 소리 하니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분명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만 쌓입니다.

분노가 쌓이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사도바울 자기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마음이 생깁니까?

생겨야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이기 때문에 왜 죽은 자가 되는 지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린 두 가지 시각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 생각을 우리 자신들이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피 외엔 우릴 구원할 어떤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누구만 자랑하도록 하시는고 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자랑하도록 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시면서 진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결국 우린 우리들이 꿈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로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계속해서 만들어 내십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사도바울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만드셨듯이 우리도 역시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만드십니다.

 

그 만드시는 방법은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는 방식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이 우리를 죽이시면서 우리 속에 살고 계십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해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이 살리시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십자가만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 나를 부인해야 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죄와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나의 죽음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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