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21

푸른 섬 2008. 4. 19. 07:30
 

두려움과 새 마음

사무엘상10:1-13                190 179 172

사람의 관심이라는 것은 항상 앞날에 대한 관심입니다.

염려라는 것이 다 여기에서 옵니다.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자신이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장성하여서 잘 살까? 좋은 대학 갈까? 사업은 잘 될까?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까?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만으로 생이 끝나버린다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일이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험이라는 것을 가입합니다. 생명보험도 가입하고, 자동차 보험도 가입하고, 건강보험도 가입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사람을 굉장한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 하시는고 하면 한마디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2장15절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선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초연하다고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인간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모두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일생에 매여 종노릇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에겐 죽음이 늘상 따라 다닙니다.

로마서5장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망,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인생들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망이라는 것이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이 땅의 어떤 인간도 사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이 죄를 깨달아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생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죄를 깨달아 라고 준 율법이라면 왜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 받는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갖는 자체가 바로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 사망이 왕 노릇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라는 것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생들에게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 세계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에게는 감사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해도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로 심히 죄 되게 드러나게 하기위해서 있다고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인간이 이런 죄인이다 이런 첫째 아담 속에 있다라는 것을 속속들이 파헤쳐 내기 위해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인생이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선언은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온갖 율법을 항상 지킬 인간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헛된 두려움과 헛고생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율법 있는 자들이 이렇고, 없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들한테 해당 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왕 노릇 한다고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사망을 피한 인생은 에녹과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죽음을 면해 보려고 해도 죽음을 면한 인생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는 자살하는 인생들이야 있지만.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사망이 왕 노릇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두려움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인생들의 간절한 바램은 우리의 인생이 사울처럼 풀리면 어떨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만날 사람과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려 주듯이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런 행복한 신앙생활을 꿈꿀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도 이런 인도자를 만나게 하시고, 또한 주님을 위해 나도 크게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되리라는 꿈을 꿀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마음을 품어보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보면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들어보면, 모두가 다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나쁜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 또한 자기 중심으로 말을 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이롭게 되었는가?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아주 깜짝 놀라게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새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울이 받은 새 마음이 무엇이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왕에 대한 새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믿음에 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새 마음이라고 했으니 지금까지 살던 방식, 사고 다 달라져서 맨 날 예수님 생각, 기도, 전도, 말씀 묵상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착각해도 이만저만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마음을 이해할 때에도 이미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그대로 투영할 뿐입니다.

새 마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사울을 사용하시기 위해 새 마음을 주셨다로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새 마음 주심이 마치 사울의 개인적인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그러나 새 마음이라는 것이 사울의 변화에 대한 초점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철저하게 사울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새 마음 주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새 마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어떻게 변화되었다 이런 것에는 애당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울의 전체 인생을 보십시오. 결국 사울이라는 왕은 버림받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선택받은 왕이 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두려움으로 사로 잡혀 버립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죽음을 어떻게 하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버릴까를 염두에 두고 성경 해석을 해 나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2장16-20절을 봅시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할 때 무엇 중심으로 해석 하는고 하면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둡니다. 왜 그렇게 해석할까요?

신적이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요. 제가 지금 억지 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선언하셨지 않습니까?


죽음을 두려워 하니 자신의 몸의 변화를 통해 죽음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성도들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도 고치고, 가난한 자도 돕고, 엄청난 핍박도 받고, 죽음도 당하고, 별의 별 일을 성도들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겪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 계속해서 전파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 언약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것을 위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무슨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을 주님이 주셨고 주님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성도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출발점이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 차원에서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 생활하는 것,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 보는 것, 헌금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무엇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우리의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욕구 충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뭐라 해도, 그 뭐라 하는 것을 갖고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는데만 관심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종노릇하는 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죽음 무섭지 않다. 내 욕구 안나온다가 아닙니다.


죽음도 무섭고 내 욕구, 내 욕망도 철철 흘러 나오지만 이런 인생 속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성도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 아닙니까?

죽음도 두려웠고 사람들의 평가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이 임한 사도 바울은 그 인생 자체가 완벽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전체가 십자가의 피 공로를 완벽하게 증거 하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완벽해 지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엉망진창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가운데 십자가의 공로를 고스란히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복된, 새 마음을 받은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이것을 위해 성령을 부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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