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31

푸른 섬 2008. 7. 4. 16:06
 

외모와 중심

사무엘상16장1-13

사울왕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새로운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리시고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시는 과정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 엘리압을 보고 곧장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사무엘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엘리압은  사울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외모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듭니까?


그렇다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실 때 사울왕의 중심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반문이 생깁니다.

중심을 보신다면 사울 왕이 그 중심이 어떠한가를 아실 것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사울왕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도 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지 않아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을 보세요.

사무엘은 사사요 선지자 아닙니까?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우리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죠.

무엇이 말입니까?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 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사울왕을 위해 슬퍼하는 모습이나 사울왕을 두려워 하는 모습은 영낙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라고 우리와 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사무엘 선지자는 갖지 않았을까요?

가졌을 것입니다.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엘리압이 기름부으실 자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은 13장1-11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열두 제자들의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끗지 못한자, 즉 가룟유다는 왜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함을 입었습니까?

깨끗하지도 못한데 가룟유다는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손색이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발만은 씻기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룟유다의 발도 다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외형적으로는 우리가 가룟유다가 틀림없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자신의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 있었던 이유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중요하니다.


그냥 구약에 말씀이 있으니 신약에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제자로 뽑혔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팔아 먹습니다.


외모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가룟유다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기적도 행하고 재정도 담당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가룟유다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다른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못난 모습이면 못난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증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외모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의 시각이 그러했습니다.

물론 그런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세우시고 버리심도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세우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외모를 본다고 했을때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다움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적들을 잘 물리치는 왕이야 말로 왕다운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여 줄수 있는 왕이야 말로 왕다운 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외모로 사람을 보며 살아갑니까 아닙니까?


성도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보더라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베드로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는자들은 외모로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왜 지옥가야 마땅한가를 전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룟유다처럼 말입니다.


왜 버림을 받아야 하는가, 왜 심판을 받야야 마땅한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성도는 심판과 구원 두 가지를 모두 품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도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날마다 현재화 되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그 십자가의 사랑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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