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33

푸른 섬 2008. 7. 26. 23:06

분냄

사무엘상 17장26-30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께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 일 없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와 일자리를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그 사람을 고용했는데 두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뒤통수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돈 들여, 공들여 쌓아 놓은 것을 힘도 들이지 않고 뺏아어 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분함을 어떻게 하면 갚을까 생각 하여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여러분이 애써 만들어 놓은 것을 어떤 사람이 모조리 빼앗어 간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저의 둘째 부인이 아니냐고요.

참 어이없는 말이지요.

특히 우리들이 하는 업을 보면 이런 이야기는 남을 죽이기에 딱 맞는 말 아닙니까?

누가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또 이 말을 전하는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는 당사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요?

분함이 안 들까요?

그런데 성경을 보게되면 참으로 우리를 당황케 하는 말씀이 쫙 깔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보게 되면 다윗은 어떤 대상을 향해 분을 냅니까?

자신의 재산을 뺏앗어 간 사람에 대해 분을 내고 있지 않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서 분을 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입지를 좁게 만들어서 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산을 뺏어가서 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에 분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없는 인간들이 할례받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 분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할례 없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분을 내고 있을까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할례를 받으려고 명하십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 14절입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를 받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거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면 할례받지 못한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할례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로부터 조롱당하는 일은 결코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열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한 분냄입니다.

오늘날 다윗같이 분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분을 낼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천국이 무엇인지 할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정말 윤리적 기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윤리적이요 속으로는 속물적인 기독교입니다.

말씀은 율법적, 윤리적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부자되고 행복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기독교입니다.

그러니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조롱했듯이 저들이 다윗같은 사람을 조롱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28절을 보면 제일 큰형이 다윗더러 뭐라고 합니까?

교만하다, 완악하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세계를 누구 핍박하고 조롱합니까?

할례받지 않는 인간들이 조롱할 뿐만 아니라 할례받은 자들이 또한 조롱하고 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하셨고 당했던 일을 그대로 지금 다윗이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영생을 준다고 하시면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받으면 될 터인데, 이런 괜심한놈이 어디있느냐는 것입니다. 니가 뭔데 영생을 준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뭔데 하나님의 아들 운운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고 제사를 꼬박꼬박 잘 지내는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같이 받들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까?

영생이라는 것도, 예수님도 항상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줄때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때 받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투로 영생을 준다면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빌립보서 4장11-12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형편에 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비천에 처해도 감사가 나옵니다.

풍부해도 감사가 나오고, 배고파도, 궁핍해도, 어떤 일을 만나도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19-21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런 말씀이 우리들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입니까?

서론에서 내가 그렇게 잘해 준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친다면 우린 참지 못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다른 세계에 사는 자들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에 억울한 일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도 내어야 되지요.

바울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저주도 내 뱉을 수 있어야 하지요.

다윗의 삶은 곧 예수님을 전하는 삶입니다.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삶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저나 여러분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굉장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신경 써지 않는 인생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주신 영생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하고 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다윗의 관심처럼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시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제발 내가 어떤 평가 받고, 어떤 대우받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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