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강해 5

푸른 섬 2008. 8. 28. 11:13

악함을 알아가는 성도

디모데전서2:9-15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화를 낼까를 생각해 봅니다.

여성운동가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바울의 디모데전서 같은 성경을 아주 평가절하 합니다.

왜냐하면 마치 여자를 만자의 부속물 정도로 간주하듯이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오직 여성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성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용해 지금까지 억압받고 억눌려 왔던 여성들의 인권을 자기들 기준의 제자리에 찾으려고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즉 기쁜 소식은 오직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복음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복음에서 곧장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곳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세요. 오직 하나님 아버지 뜻을 이루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 지심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만유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구원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는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 사람들 많이 끌어 모으는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기적으로 사람을 많이많이 끌어 모으려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돈을 많이 모르려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건강한 인생, 이 세상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만드셨습니까?

아니면 그 당시 로마 식민지였든 이스라엘을 해방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모든 세리와 창녀들을 용서하고, 그런 죄악들을 다 없애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 당시 노예였던 사람들을 다 해방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여자들도 얼마든지 남자들과 동등하다는 운동을 하셨습니까?

사회가 부패하니 그 부패를 없애는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들을 다 부자 되게 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한 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주동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하면서 자꾸 따른 생각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소개하는 성경을 보면서도 따른 마음을 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대표적인 예지요.

 

아마 오늘 본문을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여자들은 입이 숙 들어가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남자들의 기를 살리고 여자들의 기를 죽이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여자들은 본래 가정에서 남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남성우월주의 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원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남편이 말씀으로 가정을 다스린다는 차원에서 남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주도하에 가정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3,14절에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

 

이러 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가르치는 말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어떤 여자들이 등장하는고 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남자고 여자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서 남자여자의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차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남자도 십자가의 은혜로, 여자도 십자가의 은혜로, 모두모두 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왜 남편 말을 들어야 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여자가 집에서 가르치려고 하고 남자를 주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 나쁘냐고요. 이게 죄라는 것입니다.

방금 13절 14절을 읽어 쟎아요.

 

한 번 더 읽어 볼까요?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무엇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오히려 자기 있음,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억눌려 살았던 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한번 가르쳐 보려고 하고, 남자를 주관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눌려 있던 것이 확 올라오지요.

이게 오늘날 여자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외모를 꾸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더욱더 잘 드러내려면 외모를 꾸며야지요.

비싼 옷을 입어야 합니다.

금이나 진주로 치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남들이 무시를 하지 않겠지요.

 

오늘날 여자들이 모이는 곳에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누가 누가 좋은 옷, 비싼 옷을 입고, 화려하게 장식을 했는가?

헤어스타일은 누가 더 최신이며 고급으로 했는가?

이런 모습이 비단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어찌 그리 우리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지 그것을 아시고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 속이 이렇지. 그러니 이런 속으로는 , 이런 모습은 천국백성의 모습이 아니야.

이렇게 되면 또한 어떤 부류가 등장합니까?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 그리고 일체의 단장을 하지 않습니다. 수녀들이 그렇지요. 이런다고 구원이 됩니까?

이런다고 자신들의 욕망이 감추어집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는 자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여자도 여전히 가르치려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려는 욕망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입니까?

남편을 사모한다는 것이지요.

사모라는 표현을 사용하니 그게 무슨 저주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남편을 오히려 다스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여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여자를 다스린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여자의 속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남자나 여자나 다 동일하게 용서하신다고 하니, 여자들의 눈이 확 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해 평소에 갖고 있던 그 마음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희한하지요.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복음이 없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던 죄가 이렇게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니 수면위로 확 드러나 버리는 사실 말입니다.

교회란 이렇듯 죄가 없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고발당하고, 들추어냄을 당하면서 오직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우아하고, 고상하고, 점잖고, 이런 것을 고대하고 교회에 온다면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속에 갖고 있던 모든 악한 마음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없으면 지옥 백성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를 확인하며,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이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만 설교하면 남자들은 좋아라 할 것이고, 여자들은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왜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까?

그야 말로 그 마음속에 은근히 여자에 대한 적개심, 아니면 남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이런 죄악은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놓치지 않으시고 십자가 앞에 다 들추어내어 놓으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의 관심과 소망을 여자에게, 아니면 남자에게 두지 못하게 하십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고발하십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 속에서 여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가르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이 교회에서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우리에게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야 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제발 우리의 악함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늘 발견하시고, 예수님의 용서하심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늘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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