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강해6

푸른 섬 2008. 8. 28. 11:16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

딤전3:1-13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 소속되었든 지간에 감투를 쓰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감투가 자신을 더욱더 드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투를 씀으로 더 많은 희생과 봉사가 따른다 할지라도 자신의 명예를 더욱더 높이는 일이 될 수 있기에 그런 일도 얼마든지 감수합니다.

 

이런 속성은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임이야 사람들이 적게 모이니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서서히 자신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남보다 잘나야 하고, 드러나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그래서 이것을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감투를 쓰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이유가 다 헌금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직분을 줍니다마는, 그 직분을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기에 이 기회를 항상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좀 신앙 생활했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장로가 되려고 합니다.

물론 돈이 많아야 되지요. 요즘은 돈이 없으면 거의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돈과 직분을 동시에 갖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자신을 더욱더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장로라는 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날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긍휼을 드러내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더욱더 부각시키는 자들로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참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1절을 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이 말씀이 우리를 왜 당황케 하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당황케 하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제가 서론에서 사람들의 본성, 죄인들의 본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까지 와서 감독의 직분, 장로, 목사의 직분을 얻으려고 한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교회에서 직분을 얻으려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사모하기 때문에 직분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먼저 정리 해 두어야 하는 것은 선한 일이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는 우리는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는 이런 일이 선한 일에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것을 두고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6:29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사람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했을 때 당연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이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영생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전도나 기도나 헌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29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대했던 답과는 상당히 다른 답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일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9절에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3:16절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주 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로서의 감독의 삶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당황케 하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직분을 받고 있는 자들이나 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를 뒤로 나자빠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수만 톤의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과연 내가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일까 질문을 던져보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생각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2절부터 읽어 내려가 보면 이런 감독을 오늘날 찾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목사, 장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2절을 보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모습은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절제, 근신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어느 정도 절제해야 하며, 어느 정도 근신해야 감독으로 세울 수 있습니까?

 

아마 이 질문을 답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대적 기준으로 들어가게되면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이상적인 감독을 세워라고 아니라, 감독이든 누구든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안돼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독들로 세워졌던지 아니면 앞으로 세워질 사람이든지, 모두가 다 십자가의 은혜 속에 푹 파묻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해야 잘 가르치는 자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해당사항 없고, 오직 주님만이 감독의 자리에 서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독의 자리에 앉은 자는 항상 주님만 증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정리하게 되면 감독이라는 직분은 누가 가장 잘 수행하는가 라고 했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자가 감독의 직분을 받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라는 곳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드러내는 곳이지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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