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강해4

푸른 섬 2008. 8. 28. 11:10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님

디모데전서2:1-7

악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에이, 나쁜 놈 하고 끝내 버립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에이 저놈, 지옥이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야비하게 핍박한다고 합시다.

 

우리들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생길까요?

정말 저주하고 싶지 않습니까?

어찌 저런 놈은 빨리 죽지도 않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악한 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상당한 적개심을 품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착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겐 너무나 선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히는 자가 나타나면 그 인간에 대해 사정없이 욕하는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악한 마음이 펄펄 끓어올라 넘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참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갑작스럽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누굽니까?

이 사람들은 그야 말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저주하고픈 사람, 이 땅에서 없어졌으면 하며 바라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합니까?

2절을 봅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를 더욱더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이해됩니까?

 

이 당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때론 죽이기도 했고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자들을 위해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니 이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자인가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공중권세잡은 자를 졸졸 따라 다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 주니 자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이제는 자기 잘 난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저런 임금 놈들과는 달라. 나는 저런 창녀들과는 달라. 나는 저런 술주정꾼이나 사기꾼과는 달라.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자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자가 어떻게 이런 나쁜 사람들을 위해 기도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임금과 높은 자위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처음에는 기도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바뀝니다.

자신은 점점 더 거룩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면서 저들과 확연한 차별이 생깁니다.

그러면 저들을 향한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버립니다.

 

이런 마음속엔 용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판단과 저주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십자가의 긍휼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왜 성도로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긍휼을 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저주한다면 십자가의 긍휼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보면 죄를 정확히 지적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제공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힘으로 무력으로 덤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사람들이 이런 악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저들의 행위를 비교하니 악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긍휼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빌립보서2장6,7절을 봅시다.

“그는 근 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빌립보서 2장6,7절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자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행위만 자꾸 머릿속에 쌓여 지니 악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비단 바울 당시에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긍휼을 받은 자로 시작했다가 자꾸 이 복음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고,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런 가능성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제가 너의 행위를 보지 말고 십자가 지신 주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많은 핍박과 환난을 받으면서도 늘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두 번 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하는 말이 허풍을 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실상 주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저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함께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자꾸 합니다. 부정적입니다.

저들이 설마 예수님을 믿을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지요.

세리와 창기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 자들이 이들입니다.

우리와 어찌 그리 생각이 똑같은지.

 

그러니 우리들은 저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죄인이며, 해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고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십자가의 능력을 너 마음대로 축소하느냐는 것에 대한 고발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발 십자가 지신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왜 자꾸 자신의 행위를 보십니까?

성도는 자신의 행위를 보는 자들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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