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강해

강해2

푸른 섬 2008. 9. 10. 10:39

절대권력 앞에서의 믿음

다니엘1:7-16

사람들은 이 땅을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환경이 좀 바꾸어 졌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할 텐데.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과 세친구를 보면서 그들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환관장에 의해 이름이 바꾸어집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바꾸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그런데 이 이름을 벨드사살, 즉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라고 바꾸었습니다. 여기에서 물론 벨은 우상입니다. 이방신입니다.

그리고 하냐냐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인데 사드락으로 바꾸었습니다. 즉 태양의 영감, 역시 이방신의 영감을 받아 바벨론왕을 도우라는 의미라 볼 수 있습니다.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 누구인가? 인데 이 이름을 메삭 즉 아쿠 신 같은 분이 어디 있으랴?로 바꾸었습니다.

아사라는 하나님께서 도우신다인데 아벳느고 즉 느고의 종으로 바꾸었습니다.


환관장이 왜 이들의 이름을 이렇게 바꾸었는지를 우리들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도 우리에게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사야14:12-1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벨론 환관장이 자신들의 신의 이름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을 바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너희들은 너희의 신 여호와를  섬기지 말고 우리 신을 섬기라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신의 대리자인 우리의 왕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갔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가장 감시가 심한 곳에 머무는 이들은 이제 꼼짝없이 바벨론 왕의 명령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부터 다니엘과 세친구의 왕의 명을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에게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10절에 보게 되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얼굴에 기름기가 쫙 흐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당시에는 채식을 먹어도 아주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니엘과 세친구는 이런 한가한 입장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온 왕의 명에 대해서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왕의 명을 거역합니까?

그것은 8절에 나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기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을 거스를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여호와만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거스리는 그러한 음식과 포도주를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율법을 거스리는 음식, 자기를 더럽히는 음식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신명기12:16절을 보게 되면 고기를 먹을 때 피체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명기14장에 보게 되면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이 바벨론이 섬기는 우상신의 이름으로 바뀐 것을 짐작할 때에 아마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가 우상에게 드려진 후에 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고린도전서10: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따라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지금 비록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결코 여호와 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곤란한 자가 누구일까요?

환관장입니다. 자신은 왕의 명령을 시행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만일 포로로 잡아온 자들의 얼굴이 초췌하다면 당장 그 책임을 환관장에게 물을 것입니다.

10절에 나와 있듯이 환관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왕입니다. 그러니 환관장이 이들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니엘과 세친구에게 자신이 입장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말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다니엘과 세친구가 지금 포로로 잡혀 바벨론이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까?

환관장이 이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과 세친구는 그들이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열흘 동안 채식을 먹게 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말합니다.


15절을 함께 봅시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환관장 생각에는 반드시 왕의 진미를 먹어야만 얼굴이 보기에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채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여 그 얼굴이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습니다.


결국 16절을 보게 되면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에서 떠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채식을 먹었는데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였느냐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채식주의자들이 얼마나 건강하냐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 왕의 진미를 먹는 자가 얼굴이 훨씬 좋아보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환관장은 이 사실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만일 채식을 주어 그렇게 얼굴이 좋게 되었다면 다 채식을 먹일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들, 즉 다니엘과 세 친구만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믿음을 지키면 이런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않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성경을 알듯이 스데반이 믿음을 지켰지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많은 고난을 받았고, 죽임도 당하였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나 바울에게 기적을 행하심을 볼 수 있지만 이들의 결국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 주실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레미아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남유다가 범죄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기는 잡혀 가는데 오히려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살 길이라고 예레미아 선지자가 말합니다(렘27:17).


유다의 멸망은 물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레미아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과 세친구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아 선지자를 반대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바벨론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이 듣기에 누구의 말이 좋습니까?

당연히 거짓선지자이지요. 이들은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렇게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왕의 진미가 나오는 곳에서 살아가지요.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에이, 더럽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포로가 되다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유다를 멸망시키시고, 포로를 만드신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은 땅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곳입니다.

이런 진노를 경험한 자가 지금 다니엘과 세친구입니다.


이들은 유다가 왜 멸망했는지를 잘 아는 상황에서 지금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70년 포로가 끝나면 돌아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이 죄악을 행하는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포로에서 돌아 올 수 있습니다.

사실 다니엘과 세친구 같은 경우에 이들이 만일 유다에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많은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아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환경이 어떠하냐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어떠한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까?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런 곳에서조차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우상숭배하는 나라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들은 이들을 흉내내고, 이들을 닮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친구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런 가운데 있었서도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힘이 없는 자였지만 그곳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러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권력을 가지신 것도 아닙니다.

마귀의 유혹을 다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성도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어떤 종교적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을 휘어잡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도 그렇게 하려 합니다.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누구를 믿고 살아갑니까?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갑니까?

지금 돈이 최고라고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돈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바벨론 왕과 같이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이 돈입니다.

지금 그 돈이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자신만 믿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다니엘과 세친구처럼 우리들에겐 그들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한 기적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이 땅에서의 비참함입니다. 고난과 핍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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