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 5

푸른 섬 2009. 4. 6. 20:28

점점 강해지는 다윗

사무엘하3장1-5

성경을 읽다 보면 역사에 기록된 다른 것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어쩌면 성경 대부분, 아니면 성경 모두가 성경 외에 기록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 비슷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으니 성경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무슨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윗이 점점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리라고 하면서 다윗의 아내들과 그 아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엔 어떤 느낌이 듭니까?

다윗 참 좋겠다. 아내도 여럿이고, 자식들도 많이 낳고. 너무 좋겠다 싶죠.


아니면 어떻게 이런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일까?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물론 성경과 담쌓고 사는 사람은 상관 없지만, 악으로 읽든 선의로 읽든지 성경을 읽어 보면 도무지 이런 말씀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정도의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간다는 것을 많은 아내들과 자녀들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 뿐만 아닙니다.


아브넬 , 사울의 집 쪽에서 권력을 잡은 아브넬 장군이 다윗에게 오는 과정을 보십시오.

그는 사울의 첩을  통간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여기에 대해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나무랍니다. 그러자 아브넬에 뭐라고 합니까?

8절부터 10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 도다 여호와께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아브넬 장군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서 이스보셋을 다윗에게 내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보셋이 자신의 허물을 따지니까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자신이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넬이 한 행동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는데 아브넬에 사용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없는 자 아닙니까?


자신의 허물에 대해 지적하면 회개해야 할 것을 오히려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서 다윗에게 이스보셋을 통째로 넘긴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성취하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아브넬의 말대로 되어져야 합니까 그렇지 않아야 합니까?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아브넬의 말대로 되면 안됩니다.

아브넬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다윗에게 갔고 다윗은 아브넬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때 너무나 슬퍼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이해 됩니까?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있죠.


다윗의 생각에 아브넬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어떻게 아브넬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데 사용되는가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아브넬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까?


다윗이 점점 강하여 지는 과정을 보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벌이시는 일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 사람들의 행동도 수긍하기 힘들고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가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자꾸 완전한 인간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잘 빠지는 함정입니다.


마귀가 이것을 잘 노립니다.


예수님을 믿고 증거한다면 그 사람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마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간주합니다.


성도는 완전한 자가 아니라 거룩한 자입니다.

성도는 완전하여 독립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자입니다.


성도는 완벽하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완벽하게 말씀을 이루어 나가심을 목격하고 전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으로 아내들을 여럿 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해하기 힘듭니까?

아내들을 여럿 취하고 자녀들을 많이 낳은 것이 의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휼륭하다가 아닙니다.


다윗의 욕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아브넬이 자신의 위대함,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 다윗에게 찾아가는 것도 동일합니다.

아브넬은 단지 자신의 탐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다윗에게 항복을 합니다.


이것을 다윗이 군말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물론 하나의 조건을 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을 돌려보내라는 조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소유의 것은 반드시 찾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어떻게 보면 다윗의 욕심, 탐욕을 드러낸 것이지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데 자신의 아내로 다시 돌려 놓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 시대는 말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엉망이지 않습니까?


마치 쓰레기 더미가 가득차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쓰레기 속에서 말씀을 이루어나가시니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성경말씀은 이해 되지도 않고 받아 들일 수 도 없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 쉽게 이해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이해되어집니까?


인간의 죄악들이 펼쳐지는 것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인간들이 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지지하고 난리법석을 떨죠?


특히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만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팔아 먹었고, 저주도 합니다.

이게 예수님을 따랐던 인간들의 본모습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능력을 행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나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들의 탐심의 표현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신 예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물론 사용하실 때 두 종류로 사용하셨습니다.

한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아내를 여럿 거느리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나 아니면 남의 아내가 된 미갈을 다시 데려오는 것, 그리고 아브넬의 거만조차도 모두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인간들은 인간이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상 자신이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짜증내고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도에게 다가 오실 때 부활의 모습으로 다가 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들이 미시면서 다가 오시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사와 다르지 않게 드러나느냐에 대해 짜증을 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그래도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드러 나게 많이 나옵니다.


물론 말씀을 제대로 읽어보면 개판인 성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도 그렇게 많이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받지 않고 성경을 읽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십자가 지신 주님은 보이지 않고 잘난 자기만 더욱 잘나질 뿐입니다.

주님의 피흘리심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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