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 6

푸른 섬 2009. 4. 13. 17:43

다윗의 결정

사무엘하 4장1-12

마태복음13장1-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어렵습니다.

아니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가 , 수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실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습니다.

물론 귀머거리도 귀가 있죠. 물론 들을 수 없습니다마는 귀 없는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을 보게되면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 맞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말해 보세요.

무슨 말인지 다 알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내용아닙니까?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가 먹었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흙이 깊지 않아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가시들이 기운을 막으니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죠.


좋은 땅에 떨어지면 당연히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누가 들어도 이해되고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13장11-13절을 보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빠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앞선 비유 다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알아 들 을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비유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세상에서 지극히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19절부터 봅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니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뭐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죠.

그냥 그대로 읽으면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면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까?

그야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서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견디고,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이 와서 막혀 넘어지지 않고 열매를 맺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천국의 비밀입니까?

글 읽을 줄 알면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이 천국과 관련된 비밀인데, 이 비밀이 누구에게는 허락되었고 누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비밀의 말씀이 허락된 자에겐 비밀이 풀려야 하고 허락되지 않는 쪽은 비밀이 숨겨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비밀의 내용을 풀어 봅시다.

사실은 간단합니다.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는자. 이것이 비유해석의 핵심키입니다. 핵심 열쇠입니다.


그러면 간단하죠.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 복음은 무슨 역할을 수행합니까?

이들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써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들 가운데 전파되어 이 복음을 듣고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여전히 열매 없는자, 지옥가는 자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씨뿌리는 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이 어느 정도 인가 하면 복음 자체의 능력으로 허락되지 않는 자들은 절대로 그 경계선을 넘어올 수 없도록 깊은 구렁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허락된 자들.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싦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백성으로 골인한다는 말입니다.


전도 많이 한다. 기도 많이 한다. 헌금 많이 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아들의 나라에서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환난이나 핍박이나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이 와도 결코 이 복음의 능력, 위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허락된 자들에게 말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못가고가 인간의 행위에 , 결심에,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삶의 능력은 오직 복음의 능력,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만으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처음에는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을  떠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처음부터 인간의 행위는 배제해버렸다는 말입니다.


핍박과 환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이런 것들을 인간들이 감당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핍박과 환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천국의 비밀 아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렵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받은 사람은 아 그렇구나. 어느 누구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데 주님께서 맺으시는구나. 주님께서 홀로 열매를 맺으시는구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누가복음9장24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목숨을 잃기 위해 밥 먹 는 사람 나오라고 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을사람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요 주님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 말씀을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런 예수님, 일방적인 예수님을 믿는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스보셋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를 죽입니다.

왜 죽입니까?

그들이 이스보셋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레갑과 바아나는 다윗을 위하여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가 다윗에게는 어떤 행위입니까?

가위표 당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제거 되어야 되는 행위입니다.


비록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데 일조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제거되어야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내 놓는 것이 레갑이나 바아나 같은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일조했죠?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드렸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받은 자들에게는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드러내고 증거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백날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도 나오는 것이 자신의 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해보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부인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둘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들은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어떻습니까?
자살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데 있어  회개가 더 강합니까 자살이 더 강합니까?

당연히 자살 아닙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죄값을 치루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구원을 얻었습니까?

베드로입니다.


가룟유다는 천국의 비밀 아는 것으로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옥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 했기 때문에 천국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누가 하게 하셨습니까? 자기가 뉘우쳤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베드로 위에 왕노릇 했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다윗맘대로 한다고 기분나빠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되신 예수님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우리는 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유는 천국의 비밀 아는 것을 허락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 8  (0) 2009.04.27
강해7  (0) 2009.04.19
강해 5  (0) 2009.04.06
강해 4  (0) 2009.03.29
강해 3  (0) 2009.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