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 8

푸른 섬 2009. 4. 27. 10:17

점점 강성해져 가는 다윗

사무엘하5장4-25

자신이 편드는 것이 이기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편이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긴다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요?


매사에 이기는 삶, 승리하는 삶이 되어 진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순조롭게, 어려움이 오더라고 거뜬히 견디고 이겨서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싫어할 인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되어 지는 것, 바램대로 되어 지는 것 이보다 신나는 일이 없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그렇습니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점점 더 강성하여 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다윗의 손에 붙이심으로 승리를 합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여호와께서 붙이셔서 승리하여 그 성을 점령하는 일,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여호와께서 붙이시면 항상 이기는 삶.


더욱더 강성해지는 삶.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항상 이런 꿈을 꿉니다.


나의 바램대도 승리되어지는 삶. 이런 삶을 주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을 살다가 수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사기도 당해보고, 사업실패도 해 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나은 삶을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고통이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줍니까?


늘상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좀 어려움을 겪게 되면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려움 없을 때에는 주님의 뜻이 없습니까?


주님의 뜻이 고통 중에, 어려움 중에 있을 때에 있고 고통 없고 평안하면 주님의 뜻은 사라져 버립니까?


주님의 뜻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인간 문제 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럴 것입니다.

고통을 언젠가는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 주실 것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답니다.


너무 멋진 말이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말씀보다 더 위로되고 격려가 되는 말이 아닙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어려움 당한 자에게, 고통당한 자에게, 병든 자에게 이런 말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목사가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웅으로 만드시기 위해 이런 고통을 주셨습니다 라고 해 보세요.


아마 병석에서나 어려움 중에서 엄청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인간영웅 만들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시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내용들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봐라. 이제부터 다윗이 잘 풀린다.

잘 풀리긴 뭐가 잘 풀립니까?


또 꼬입니다. 꼬이고 풀리고 꼬이고 풀리고.

이게 다윗의 인생이요, 성도가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사실 꼬인다, 풀린다는 말은 인간적인 입장일 뿐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꼬인 것이고,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풀린 것입니다.


즉 지옥 가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영웅을 만든다는 것도 철저하게 인간적인 입장, 즉 지옥 가는 길에 서 있는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영웅은 없습니다.

성경 인물 인물을 보면 영웅이 아니라 죄인으로 나타나며 이들은 한결같이 누구를 전하는고 하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이들은 매우 불쾌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이들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이 우리 인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욥과 같은 사람은 우리 인간의 기대에 미칩니다.


나중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옥 보낼 자들은 반드시 지옥 보낸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죄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 길로 가야 할 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지옥 길로 가게 하셔야 합니다.


욥기를 보면서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욕망과 맞추어 보니 당연히 환영하고 박수칠  내용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보면서 위로를 얻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위로를 얻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노라면 내 직장도 집어치어야 할 것 같고, 아내도 버려야 되고, 자식도 버려야 되고, 재산도 팔아야 되고 , 뭐 나에게 온전히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얻는다고 하니 명목상 예수님을 믿고 실제 내용상으로 들어가면 내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편이 되어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 복음이나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신이 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가롯유다나 아니면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대상으로 두게 되면 견딜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안됩니까?


왜 그렇게 최고의 형벌을 예수님께 가해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들이 그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 그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까?

인간의 욕망, 탐욕, 죄악들을 속속들이 꺼집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는 죄인이야. 너희는 지옥가도 마땅해, 내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씀에 머리가 획 돌아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그들이 살수 없고,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을 시체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 없다. 오직 있는 것은 나 자신만이 있다.

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철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뇌과학적으로 등등 여러 가지로 답변을 하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마시고, 여러분의 좋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기쁨을 누리시고, 여러분의 삶을 채우기에 하루하루가 빠듯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말이지 않습니까?

이런 삶을 꽉 채운 하루라면 잠자리에 누우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누구의 삶을 채웁니까?

자신의 삶을 채우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좀 현실적이고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먹혀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구닥다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보지 않고 자신의 꿈을 지지해 주는 본문으로 본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골로새서 3장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삶을 살까요?


5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바람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지셨는가를 알아가는 자요,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사무엘 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강해 9  (0) 2009.06.10
[스크랩] 강해10  (0) 2009.06.10
강해7  (0) 2009.04.19
강해 6  (0) 2009.04.13
강해 5  (0) 2009.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