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 2

푸른 섬 2009. 3. 16. 18:18

여호와께 묻는 인생

사무엘 하2장1-7


인간들은 묻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묻지 않는 인간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자신 속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본성은 늘상 신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속으로부터 튀어 나오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묻습니다.


그 대상이 나무가 되었던 하늘이 되었던 돌이 되었던 흙이 되었던 하늘의 별이 되었던 부처가 되었던 예수가 되었던 누가 되었든지 항상 묻습니다. 하나님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지만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비교할 때 절대 뒤지지 않는 존재, 신적 존재임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 자신임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묻는 것, 즉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며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 조차도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나무도, 돌도, 하늘의 별도, 달도, 해도, 바다도, 웅장한 산도 그 어떤 것도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 하나 죽으면 끝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만물이 존재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만 죽으면 이 모든 만물, 신 조차도 다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이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나올수 없고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께 묻고 바라고 구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 육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도입니다.


인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하여서 이룰 수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눈에는 마치 인간 자신을 위한 기도요 인간이 얼마든지 이룰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는 것은 이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딴 나라 이야기입니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 이야기입니다.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는 것을 묻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다윗의 삶이 이런 인생입니다.

다윗이 물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삶이 묻는 인생,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으로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온 삶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4장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서시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심판주 되신 십자가 지신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던 바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당황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모든 일이 예수님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마귀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바다도, 풍랑도, 어떤 것도 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죽은 자이든지 산 자이든지, 바다든지, 땅이든지, 나무든지 어떤 것도 다 에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18절을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버릴 권세를 가지셨기에 본디오 빌라도와 그 일당이 예수님이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것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이 아닙니까?


십자가 지심이 예수님 자신이 버릴 권세를 사용하셨기에 그러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얻을 권세가 있기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제가 서론에서 이런 말씀을 드렸죠.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기를 바라며 그렇게 행동하고 기도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마음대로 되어진다는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하죠.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여호와께 묻는 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12-14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니리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무나 멋지 말 아닙니까?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든 일, 그 이상의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만 하면 다 시행해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말씀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지요.

예수님이 도대체 왜 그러한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 지신 분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러한 일을 행하셨지요.


그래서 놀랍게도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되심이 계속해서 전파되어 집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처럼 똑같이 죽은 자도 살아나고, 병자도 낫고 하는데 정작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예수님처럼 똑같이 죽음의 길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인간을 실망시킵니다.

다윗이 헤브론 땅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됩니다.


일단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으니 그 인생이 좋겠다 싶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 일생을 통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되신다는 사실을 왕노릇 하면서 제대로 보여 주는 인생이 됩니다.


이방나라의 왕처럼 자기 자신을 욕망, 탐욕을 위해 살았다면 우리는 좋아할 것입니다.


요셉을 아세요.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 때문에 그 인생이 꼬인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생이 꼬인 인생이지만 꼬인 속에서도 뭔가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인생.


결국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자기 손안에 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요셉의 인생이 잘 풀린 인생이죠.

그런데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50장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험난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자기의 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구하기 위한 인생.

이것이 처음부터 요셉에게 주어진 인생입니다.


요셉은 이런 모습을 통해 장차오실 예수님의 주되심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하는 인생을 삽니다.

묻는 인생.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인생. 그러면서 그대로 시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을 사는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주님의 십자가를  끝없이 전하는 인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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