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사무엘 하 강해 1

푸른 섬 2009. 3. 10. 09:59

다윗의 애가

사무엘하 1장

사무엘 상은 사무엘의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사울의 죽음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사무엘 하는 사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어 남과 죽음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삶이 있습니다.


태어 남과 삶과 죽음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죽음과 상관 없는 사람도 있고 태어나면서 죽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았던 저렇게 살았던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주체성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 인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영원히 즐거워 하며 살아야지.

그래 결심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그 이름을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 품안에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주체자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따로 갖고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무엇을 알게 되는고 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자신의 주체자로 살았던 것이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영원히 즐거워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지신 주님,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되신 에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그 이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인생.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늘상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고 하면 죄인인 상태,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우스운 세상입니다.

물론 자신이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자식잘 되고 잘 되고 잘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알아가는 인생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을 삽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생각은 아에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것도 나의 영광을 위해서 , 나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직장을 위해서, 나의 회사를 위해서 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겠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 취하기가 바쁜 인생들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 누구입니다.

엘리제사장과 그 아들들이 아닙니다.


이들관심은 하나입니다.

자신들 배불리는 것이요 자식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말렉 사람들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비웃음의 대상일 뿐입니다.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왕권 지키려다 거의 미친 사람이 다 되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몇몇 사람 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삶을 살았지 대부분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산 인생들입니다.


주류가 인간 영광 자기 영광을 위해 산 사람들입니다.


노아시대만 보더라도 노아의 그의 가족들 외엔 방주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까?

숫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상관없다는 것이 인생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인간들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지 않는 인생은 결국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을 한번 보세요.

다윗이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요나단은 나의 편이었으니 당연히 많이 슬퍼하겠지요.


그러나 사울왕의 죽음은 어떻습니까?

꼬시다 아닙니까?


그 놈 잘 죽었다. 나를 죽으려고 발악을 하더니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셨네.


이것이 우리의 본심 아닙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나를 괴롭히는 놈이 죽으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잔치라도 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너무나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사울왕을 죽였다고 하면 당연히 큰 상을 내려야 하는 것이 우리들 생각에는 정상입니다.


그래서 아말렉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아말렉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반응이 다윗으로부터 나옵니다.


죽여라. 

상을 주어도 시원찮은데 죽음을.


이런 내용들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뚜껑이 열리는 내용입니다.


좀 정상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좀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죽음이나 요나단의 죽음을 동일하게 슬퍼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제 설교에 의하면 분명 사울은 나쁜놈 요나단은 좋은 사람. 다윗도 좋은 사람 이렇게 들었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경계선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경계선이 무너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왕이 옳아서. 그것 아닙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울왕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했는 것과 상관없이 ,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셨고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사울왕과 요나단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대표하는 왕이었고 왕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과 요나단의 죽음을 동일시 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나단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와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어떻게 행했느냐에 관심이 있고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요나단에게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1-11절을 보면 성도간의 송사문제에 대해 나옵니다.

형제들끼리 송사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문제 삼습니까?


세상 법정에 고소한 것에 문제를 삼는 것입니까?

그런 것 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6절 7절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죠.

누가 불의를 행하고 속인다는 것입니까?

제가 볼때에는 둘다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이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10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무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고발하는 자나 고발당하는 자 모두가 다 어떤 류에 해당되는고 하면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자, 탐색하는 자 ,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의 부류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 송사 당할 일을 했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송사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이유는 바로 십자가 피공로를 무로 돌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자, 탐색자,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공로를 생각지 않는 자들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는 어떤 자들입니까?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


성도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본래  자신이 어떤 자였고, 어떻게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는가를 확인해야 일입니다.


이미 송사는 일어났습니다. 이미 문제가 터져 버렸죠.

이런 상황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일어날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의 피공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는 자가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그렇죠.


다윗은 자신의 개인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다윗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에만 모든 것을 기울이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이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내가 어떻게 될까?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하니 사람들이 난리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난리 법석을 떨지 않습니다.


성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먼저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인고 하면 하나님이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의 은혜 그 사랑의 증거에만 관심 있는 사람입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큰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흙탕물에 쓰레기 와 수많은 종류의 것들이 함께 휩쓸려 떠내려 갑니다.


성도가 지금 이런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큰 물 속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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