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1-8

푸른 섬 2009. 8. 7. 01:14

낙망하지 않는 기도
누가복음 18:1-8


오늘 본문 말씀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에 대한 선입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끈질긴 기도의 필요성’

과연 이런 제목이 맞을까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면 기도응답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과부가 끈질기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요청을 하니 불의한 재판관이 그의 원한을 풀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우리의 요청을 끈질기게 하면 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끈질기게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면 들어주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이런 식의 기도와 응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부터 풀어 봅시다.
1절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사람인고 하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아 되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도는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지고, 동시에 낙망할 정도의 처절한 상황에 놓여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할 수 밖에 없는가? 낙망할 처지가 어떤 처지인가?

비유를 살펴 봅시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있습니다.
과부가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무엇을 풀어 달라고 합니까?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줄 것이라는 것은 아마 0.001%도 생각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믿을 곳을 불의한 재판관 밖에 없습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원한을 풀어줍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이 7,8절입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원한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원한 갚아달라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 하는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면 꼭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시는고 하면 원한 갚아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한이 돈에 대한 원한 일까요?
아니면 건강에 대한 원한 일까요?
아니면 자식 잘되게 해 달라는 원한 일까요?

마태복음 6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는 정성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드라마를 보면 한 겨울에도 물 한그릇 떠 놓고 하얀 소복입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끈질기게 기도합니까?
이방인들의 사고 방식은 말을 많이 하고 오래하면, 정성을 다하면 신이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들어 줄때까지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마태복음 6:31-3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 목숨걸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건강하게 해 주세요. 잘 살고 부자되게 해 주세요. 자식 잘 되게 해 주세요. 우리 나라 부강한 국가 되게 해 주세요. 이런 내용의 기도입니다.

이들은 이 내용의 기도를 이루기 위해 정말 끈질기게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기도가 이루어 질까요 지지 않을까요?
이루어 지는 것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주몽을 보면 아주 잘 표현 해 주었는데, 대소왕자가 주몽이를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벼락맞아 신녀가 죽습니다. 그런데 주몽이는 자신의 지역에 역병이 돌고, 식량난이 왔을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죠. 어떻게, 정보를 얻어 해적질 하는 사람을 만나 약재와 양식을 공급받지 않습니까?

결국 이게 무엇입니까?
땅의 것들 아닙니까?

기도한 것들이 땅의 것들이니까 당연히 땅의 것으로 응답되어질 있습니다. 물론 응답이 아니 될 수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저들은 이것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신께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되든 자신들 임의대로 신의 응답이다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땅의 것이 아닙니다.
땅의 것이라면 우리도 역시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정성을 다해 기도 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의 것, 땅의 기도는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성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끈질김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항상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요,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왜 항상해야 합니까?
원한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이라는 것은 이방인과같이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님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원한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6:9-11절을 봅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 까지 하시려 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가지 하라 하시더라”

원한이 어떤 원한입니까?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말입니까. 자기피를 흘린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왜 저들에게 피흘림을 당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이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을 좋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걷어 치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걷어 치우면 왜 사람들이 기쁠까요?

십자가만 제거하면 자신들의 자랑거리와 자신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내세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정성을 다하는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가 제거되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욕망대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십자가만 제거 되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훌륭하고 괜찮은 인간인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죠?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는 꼴이죠. 왜 그럴까요?
십자가는 인간이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인데,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고 자랑하니까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감옥으로, 죽음으로 내 몰립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자신이 가진 증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증거 말입니까?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십자가만 앞장 세우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만 앞장 세우는데 왜 사람들이 미워하는가?
그 이유는 십자가가 사람의 행위일체를 인정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요.
이게 성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원한 갚아 달라는 것이지요.
무슨 원한,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핍박을 당하니 그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가면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8절 후반부를 보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자가 올 때에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기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시겠다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과부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과부는 믿을 것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누굽니까? 불의한 재판관이죠.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믿을 것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까?
아니면 예수님도 믿고 다른 것도 믿고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까?

여기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믿을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낙망한다는 말은 어떠하길래 낙망을 할까요?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기대하는 것과 주님이 주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7장 33절에 보면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런 원리가 주님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가 작용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어떤 기도를 할까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가는 자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자기목숨을 보존하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전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밤에 두 남자가 자리에 누웠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성도는 외형적으로는 사실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회사나 공장이나 가정에서 일할 때 믿지 않는 자들과 구분이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나 마음은 어떻습니까?
다릅니다.

저들은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탄식하고, 주님만 증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지요.
그러니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의지 하니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 항상 기도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나의 힘과 수고와 노력이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님되신 예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성도는 인자의 날에 믿음 있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서야 1절과 8절이 연결 되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긍휼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며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 지신 주님만 더욱더 의지하는 자입니다. 믿을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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