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푸른 섬 2010. 12. 27. 21:31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누가복음2장1-7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나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곳들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소비자가 필요한 곳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보다 장사꾼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더 반기는 듯 합니다.

 

아니 예수님 탄생이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습니다.

 

이천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는 모두가

다 아담안에 갇혀 사는 인간들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땅에 첫 번째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몇몇사람들에게는 환영받았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주님께서 보내신 자들이지요.

주님의 지시로 이들은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7절을 한번 봅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맏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이 어디에 누워 있습니까?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이유는 방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오심이 하필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이 내린 싯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 합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있다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 갔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태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호적하러 사람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여관에 방이 있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예약하고 호텔에 머물면 될 텐데.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에는

이런 인간들의 바쁜 상황 중에 오셨습니다.

 

소도 키워야 하고, 구제역 예방도 해야 하고

, 장가도 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쁩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셔도 어느

누구하나 돌아 보는 자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낸 자들 동방박사나

 목자들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계신

 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 동화 같은 것을 읽다보면 나그네들이

 잘 곳이 없으면 헛간 같은 곳에 잠을 자지 않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을 때에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이렇듯 동물들이 여물을 먹는 통 위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나타나 뭐라고 합니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방이 없이 구유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어떤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대박나는 것 아닙니까?

 

호텔 같은 곳에서 밥먹고, 비싼 차 타고,

비싼 옷 입고, 비싼 집에서 사는 것.

이런 것이 큰 기쁨의 소식 아닙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일등을 해 왔다.

월급이 많이 올랐다.

 

병이 나았다. 이런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구유에 누인 아기가 큰 기쁨의 소식이랍니다.

상상이 갑니까?

 

이것은 마치 우리 자녀가 모든 과목을

영점 맞았는데 큰 기쁜 소식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교인한명 남았는데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목사가 주일날 설교단에 섰는데 교인 한명,

 그것도 자기 와이프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목자가 고생하면서 한밤중에 양떼를 지키는데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구유에 누인 아기가

 큰 기쁜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천사의 말이니 그래도 들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처지와 구유에 누인 아기의

 처지가 어떻습니까?

 

목자들에게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이 큰 기쁜 소식이 될까요?

특급 병원에 아기가 누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급 호텔에 아기가 누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리어리한 왕궁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혹 모르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곳에 누워계시면

 목자들이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관이 있을 곳이 없어,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를 가져 온다는 말입니까?

 

엄청난 돈을 갖고 있고,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아들로 왕궁에 태어 났다면 좀

이해될 말씀이 아닙니까?

 

차라리 가이사 아구스도의 아들로 태어

났다면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납득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어느 곳에 모입니까?

 

이런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

돈 되는 곳에 모이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가야 기쁨이 있고 이런 곳에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요?

 

교회가 만들어 내는 예수님은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구유도 치장을 합니다.

 

구유도 아름답게, 그리고 안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 만든 구유의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아늑하게 보입니까?

 

어떻게 보면 특급호텔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저께 호텔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니 구유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과자로 만들어 놓았지요.

 

구유를 연상 시키는 집인데요.

물론 장사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어요.

그렇습니다.

 

장사가 잘되는 구유.

돈 되는 구유야 말로 참으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지요.

이런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까요?

 

교회마다 트리를 하고 반짝반짝이는 불꽃을 장식합니다.

물론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호텔, 길거리, 식당, 어느 곳이든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정말 구주가 오셨기에 그렇게 할까요?

 

매 성탄절 때 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설 날이면 떡국을 먹듯이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트리를 장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문화가 되어 버리고,

기도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다 인간들이 하는 하나의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지요.

이것은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이런 문화라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증거하느냐 말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배를 이용하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 기도를 이용합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설교합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의 구유에 누우심을 이용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그렇게 합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인간들의 즐거움, 쾌락이 가득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괜히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외면당합니다.

요한복음1장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요한복음1장에서는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들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즉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구유에 그냥 내벼려 둡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시편2편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사도행전4장27-28절을 봅시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군왕들이 열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들이 열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가지로 부국, 부자되는 것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박 끊기입니다.

 

물론 저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조종하는 마귀는 알고 있지요.

저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들의 행동하나하나의

 목적은 주님과 연결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독립적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몇일 전 뉴스를 보니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처형한다고 합니다.

물론 감옥에도 보내고 말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북한이 아주 나쁜나라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요 하나의 종교집단이지요.

 

그러나 사실 한국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내 뱉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합니다.

 

만일 저들이 할 수만 있다면 죽였을 것입니다.

단지 법이 이런 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그래서 못 죽일 뿐이고 감옥 못 보낼 뿐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꿈꾸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

 아니 주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짓밟아 버립니다.

 

뭉개 버립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공 성공, 축복 축복으로 말입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예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조직을 와해 시키는 예수님은 죽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누가복음9장57-62절을 보겠습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게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면 별로 밉지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을 잡고 예수님을 한번 믿어 보겠다고,

 따라 보겠다고 나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십니다.

 

부친을 잠시 가서 장례식 치르고 오겠다는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잠시 가족과 먼저 작별인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해도 너무한 말씀이 아닙니까?

 

겨우 마음을 잡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려는데 왜 초를 칩니까?

이러한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씀을 여기에 한번 적용해 보세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 보는 자가 아닙니다.

 

죽은 아버지가 있어도 작별할 가족이

있어도 장례식은 죽은 자들에게, 작별도 하지 말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른 자들에게 주님은 평화를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약한 말씀 아닙니까?

 

이런 고약한 말씀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런 고약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철저하게 소외 당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철저하게 소외당하십니다.

이 소외당하시는 주님과 함께 소외당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피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미움받고 소외 당하는 자가 평화를 받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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