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20

푸른 섬 2009. 8. 30. 15:44

정체가 탄로남

사무엘하16장1-9

압살롬의 반역성공으로 다윗은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분명 믿음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업신 여긴 죄로 그 죄값을 치루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되면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즉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죄값은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나쁜짓을 했다. 그러면 그 나쁜짓 한 값의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까?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즉 자신의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당연히 죄를 지으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이 형통하다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까지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쁜 짓을 하면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담안에 있는 사고, 즉 선악체계에 속한 사고 방식입니다. 선악체계는 반드시 정죄라는 것을 갖고 옵니다.


선한 것을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악한 짓을 하면 그에 따른 벌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자신이 그렇지 않나요. 나쁜짓을 하면 스스로 가슴이 꽁딱꽁딱 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더라도 여전히 그 속사람이 그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도는 늘상 어디로 달려가는고 하면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도냐 아니냐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꽁딱꽁딱은 똑 같은데 하나는 십자가로 달려가고 다른 사람은 무언가 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아닌 자는  자신의 잘못한 행위를 잘한 행위로 보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의 피흘려 주심의 공로로 깨끗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늘상 죄가 표출되면서, 심지어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는 생각이 나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더라도 인간적인 행함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을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중 한 사람을 보세요.

인간적인 벌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물론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그 행위에 대한 벌입니까?

그렇지 않죠?

오히려 그에겐 영생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죽음이 어떻게 벌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을 죄값을 치러는 다윗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 여긴 죄값을 치루게 합니까?


말의 논리가 좀 안맞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 여긴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죄인들을 꺼집어 내는데 있습니다.


즉 분류작업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린 죄를 지어 그 벌을 받는 다윗을 보면서 간단하게 다윗 개인의 문제로 돌려 버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다윗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그 속에는 다윗 편, 그리고 다윗 아닌 편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징계를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작업을 펼치시는고 하면 갈라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누가 진정으로 다윗에게 속했고 누가 다윗에게 속하지 않았는가를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본색을 한번 봅시다.


압살롬은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15장13-18절을 보면 왕의 신복들과 권속들,  후궁 열 명과  모든 그렛 사람, 모든 블렛 사람, 가드에서 온 육백 명이 나옵니다.

이들은  다윗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위기에 처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때 다윗과 함께 한 자들입니다.

특히 이들 중 후궁 열 명은 다윗 때문에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19절에서 23절을 보면 가드 사람 잇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죽든지 살든지 왕과 함께 그곳에 있겠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은 비교를 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사람들은 비교하면 뭐라뭐라 하죠.

그런데 성경은 늘상 비교입니다.


이방인 잇대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비교.


24절에서29절에는 사독과 아비아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다윗과 함께 하고자 했지만 다윗의 말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다윗은 언약궤를 사사로이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전 같으면 언약궤를 자신이 있는 곳에 갖다두려 했겠지만 이젠 언약궤에 자신이 분명히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30-37절을 보면 후새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다윗 편이지만 여전히 예루살렘 성에 머물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머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머뭄입니다.

우리가 많이 보지 않습니까?

어간하면 다 죽이잖아요.


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다윗왕의 충실한 종이 됩니다.


16장1-4절에서는 시바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므비보셋의 사환입니다.

엄청난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을 맞이 합니다.


다윗이 묻습니다.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졌왔느냐고 말입니다.

왕을 위해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므비보셋에 대하여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왕이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시바 너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다윗왕의 위기를 통해 한 몫을 챙겼습니다.

물론 그의 마음에는 분명 다윗이 압살롬을 제거할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16장5-8절에는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오면서 다윗을 향해 연이어 저주를 퍼 붓습니다.


7절 8절을 보세요.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딱 맞죠. 죄를 지었으니 그 벌을 받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지금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그 시므이가 말하는 이유와 다르죠.

그런데 시므이의 눈에는 다윗이 그렇게 보입니다.


9-14절을 보면 아비새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당장 시므이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달라고 다윗왕께 요청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12절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참 다윗 답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가 팍 죽은 다윗 모습 같죠.


11절에 보면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 모든 일들을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다윗은 완전히 자포 자기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죠.


마지막에 가면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은 이런 것과 다릅니다.


자포 자기의 말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저를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벌리심을 믿고 지금 도망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자 시므이는 산비탈을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립니다.

이런 모욕이 어디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당해야 합니다.


15-19절에는 다시 후새가 나옵니다.

후새가 다윗의 계획대로 압살롬을 감쪽같이 속입니다.


20-23절에는 아히도벨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의 힘이 어느정도 인가?


2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의 응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히도벨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의 모략이 어떤 모략입니까?

다윗왕의 후궁과 동침하라는 모략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얻는 이익은 곧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미워하는 바됨을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힘이 더욱 강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모반성공을 선언하는 것이 다윗왕의 후궁과 동침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왕이 별 문제 없이 지낼 때에는 모든 것이 수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을 하나님께서 잡고 흔드시니 그 주변이 지진이 일어난 것 처럼 난리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단순이 다윗을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과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의 정체를 들추어 내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게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런데 이 모습을 믿지 않는 자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한다. 그것도 변명이라고.


그러나 성도는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쪽은 주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요 다른 한 쪽은 인간의 행함 즉 인간의 모습을 보는자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주님의 피공로를 찬양하지만 다른 쪽은 그 따위 행위라면 나 예수 안믿어라고 하면서 오히려 저주를 퍼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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