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23

푸른 섬 2009. 9. 13. 20:35

빈공간이 없는 믿음

사무엘하17장27-29

이 땅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이 과연 어떤 예수님일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항상 자신의 기대치에 준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해도 항상 자신이 기대하는 바에 대해서만 받아 들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달달 외운다 하더라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 가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뭔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으면 그냥 넘어갑니다. 아니면 자신의 기대치로 그 성경본문을 끌어당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때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다윗 일행을 대접합니다.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그야 당연하죠.


다윗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 중심으로 해석하면서 곧장 그것을 어디로 끌어 당깁니까?


자기 중심, 즉 예수님을 믿는 자기 중심으로 이 본문을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모두 내 중심으로 일하시는 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죠.

혹 내가 진노를 당할때에라도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택하신 자는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반드시 누구를 통해서든 먹이시고 입혀주신다라고 말입니다.


그저께 제가 돌고래 쇼를 보았는데 돌고래서 조련사의 뜻에 따라 재롱을 부립니다.

만일 재롱을 부리지 않으면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고래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조련사는 절대로 나를 버리지도 않고 늘 사랑으로 돌봐주고 지켜 주고 먹어준다라고 말입니다.


돌고래가 착각하고 있죠.

자신의 먹는 것조차 다 돌고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련사를 위해 더 나아가 구경꾼을 위해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돌고래 수준이라 여겨집니다.


다른 세계를 볼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세계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반드시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내 존재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성취를 위해 그를 지키실 뿐이지 결코 다윗자체에 목적을 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됩니다.


다윗이 주가 되고 하나님은 종이 될 뿐이지요.


다윗은 부정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인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어보면 항상 이 땅의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는고 하면 인간이 갖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수한 빈공간에 인간이 무엇가를 가득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설교의 중심입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가득가득 채워넣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땅의 헛된 것을 추구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헛된 것은 무엇이며 주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헛된 것은 세상명예, 돈, 세상 영광, 장수 등등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주체가 되어서.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이 없어요.

물론 답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답을 다 알고 있거든요.

헌금하기, 기도하기, 전도하기, 봉사하기, 교회 열심히 출석하기 등등.


이런 것을 목사가 알기 때문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목사는 양심이 좀 남아 있는 사람이죠.


그러나 양심 없는 목사는 노골적으로 주님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땅의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주장은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으로 그곳에 가득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로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십자가에서 부정당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으로 무언가를 채울 여유 공간이 하나도 없는 곳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야 행위의 세계가 아닌 믿음의 세계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5-7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산상설교가 있습니다.

이것을 산상 수훈이라고도 하고 .


아무튼 마태복음 5-7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천국백성이 해야 될 일을 가득가득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씀입니다.

28-34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 까 하지 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한편으로 갑갑하고 한편으로는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 곰곰이 이 본문을 묵상해 봅시다.

정말 우리 인간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존재입니까?

이 말씀을 들어서 순종할 수 있는 인간 있습니까?


아무도 들풀을 보면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인간 없습니다.

이 땅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자신이 지켜 채우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난 다 주님이 먹여주신다.

내일 일을 염려않는다. 주님이 다 하실 줄로 믿는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한 목사가 참 믿음 좋은 것 같죠?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주님이 채워 주실 줄로 믿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의 행위가 근거가 되어 먹을 것 입을 것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에 불과하죠.

그래서 마태복음8장에 보면 첫 빠따로 누가 등장합니까?

산산 설교 지킨 사람,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문둥병자가 한게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고 다짜고짜 뭐라고 하는고 하면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문둥병자에게 행위가 있었습니까?


또 무식한 인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절하였고 주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나와서 절하고 주님께 요청 합시다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을 가졌습니다.

지금 문둥병자가 이렇게 한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말입니다.


아무 소용없다는 뜻으로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오직 주님 되신 예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산에서 내려오시는 가운데 무리중에 배치하셔서 지금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까?

이미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수 있는 행동은 모두다 지옥가야 마땅할 행동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문둥병자의 행위를 예수님의 깨끗게 하심의 근거나 아니면 조금의 도움으로 간주한다면 이 사람은 지옥갈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 후에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산상설교를 다 지켰습니까?

아니죠.


이 문둥병자에겐 예수님의 사랑이 덮쳐진 것입니다.

마치 지난주 제가 본 영화에서처럼 쓰나미가 덮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를 덮친 것입니다. 


성도란 이런 자입니다.

문둥병자같은 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덮쳐진 자입니다.

그 피가 맘속에 증거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가득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고백은 늘상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피공로만 의지합니다.

주님되신 예수님만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가 됩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 피 외에 무슨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꿈을 꾸고 조장하는 자는 주님의 덮침을 받지 못 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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