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24

푸른 섬 2009. 9. 27. 21:03

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18장28-33

압살롬은 그의 자랑거리였던 머리카락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말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여 버립니다.

이 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왕의 마음을 알기에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구스사람을 보내어 구스 사람이 본 것을 왕께 전하라고 합니다.


이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청합니다.

자신이 가서  이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입니다.


요압이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가 가고자하여 요압이 허락합니다.


구스 사람이 먼저 출발했지만 아히마아스가 먼저 다윗왕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28절

이에 대해 다윗왕은 누구의 안부를 묻습니까?


압살롬의 안부를 먼저 묻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그 때 마침 구스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구스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앞서온 아히마아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시 다윗왕이 묻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사람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32절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보고를 합니다.


이 보고를 받고 다윗은 슬픔에 잠깁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든 대사 아닙니까?


드라나마 영화에 많이 나오는 대사죠.

자식이 죽으면 그 죽은 자식을 붙들고 우는 수많은 부모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얄굳게도 지금 다윗과 요압 그리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 사이에 구스 사람을 집어 넣어 놓았습니다.


구스 사람의 관심은 하나입니다.

다윗왕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신 다윗왕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압, 그리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관심은 두 군데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쪽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다윗왕이요 다른 한 쪽은 인간 다윗왕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압이나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살짝살짝 뒤로 돌리려고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부모가 가지는 심정을 다윗은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에 밧세바가 낳은 첫째 아들이 아플때에는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금식하고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죽자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떻게 합니까?

살아 있을 땐 냉대하다가 죽으니 슬퍼하며 니가 살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압의 잔머리로 구스사람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이 살아 있느냐입니다.


여호와 전쟁의 승리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독의 아들이 전해준 전쟁의 승리가 결코 기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압살롬에게 가 있는데 전쟁이 승리하고 말고가 다윗에게 무슨 기쁨을 주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우린 이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봅니까?

분명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나 구스사람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으신 전쟁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승리케 하신 전쟁이 아닙니까?


그러나 다윗은 여기에 관심 없습니다.

자기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요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압살롬을 죽여 놓고 다윗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만을 전해야만 한다는 의무에만 치중해 있는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스 사람만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전합니다.

정말 눈치 없는 사람입니다.


구스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무리 원수지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명을 내린 다윗의 마음을 몰랐을까요?


성경정황상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스 사람은 자신이 본 그대로 다윗에게 전합니다.


자신이 본 그대로라 함은 구스사람의 보고 속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구스 사람은 분명 여호와께서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는 전쟁에 참여 했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대가 비록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스사람은 압살롬의 죽음이야말로 여호와께서 다윗왕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시는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1장1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이라”

22-2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만나면 그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동기들이 나를 좀 멀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당시 제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십자가 복음을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에게 반박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글이 논문수준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신학을 펼치려면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아서 써라는 말입니다.

아니면 글을 쓸대 각주를 제대로 달아서 쓰라는 것입니다.

참고 도서를 써라는 것이지요.


이게 여러분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누가보아도 이 글은 공부많이하고 연구 많이 한 사람의 글이다라고 인정할 만한 글을 쓰라는 것이지요.


그 당시에 독일에 유학갖다 온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글을 이근호 목사님과 전혀 다르게 썼죠.


아주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을 안 믿어도 납득이 되는 글을 쓴다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의 도가 빠져 있는 글이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자료와 자료를 조합해서 삼위일체 관점에서 세상모든 것들을 보자는 견해인데, 그곳에 십자가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들어가도 아마 한 모퉁이에 쭈굴시러워 내 놓을 수 없는 십자가가 됩니다.


두 목사님들 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해서 제가 평가할 입장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제가 보기엔 한쪽은 십자가복음만 전하고 다른 한쪽은 학문으로, 자료로 복음을 전하게 보였습니다.


설교를 위해 다시 그 목사의 글을 찾아보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차비가 좀 많이 들고해서..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가급적이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 납득이 가고 인정되어지는 예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식하게 십자가를 들이밀어서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라는 말이죠.

설교시간에 어떤 인물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마는 제가 이근호 목사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기에 딱 좋아서 예를 든 것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할 때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죠.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표적을 보여주면 될 것이요, 헬라인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려면 지혜를 알려 주면될 것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표적들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지혜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를 완전 부정 하는것 아닙니까?

표적, 지혜에 비교해 볼 때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많이 배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옵니까?


사람들의 관심은 자꾸 어디에 둡니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께 두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둡니다.

왕인 다윗에게 둡니다.


그러다 보니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압살롬의 죽음을 말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무식하게 십자가를 들이대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2-24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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