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강해

강해2

푸른 섬 2009. 12. 13. 16:59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오바댜1장10-16

사도행전5장29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 나셔서 만유의 주님이 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권력을 가진 자들 즉 힘이 센 자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복음 전함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때 한 말이 바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즉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겐 그래 맞습니다라고 순종되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겐 이 말씀이 정말 듣기 싫은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말씀을 정말 듣기 싫어하는 자들의 태도를 한번 봅시다.

33절에 보면 사도들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이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법사 가마리엘의 의견에 이들이 동조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는 말 말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 가마리엘의 말엔 일리가 있어 동조를 합니다 마는 사도들의 말엔 동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일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받아 들이기에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들이 자기 말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신 예수님의 영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령을 힘입어 전하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 들이기 힘듭니다.

받아 들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말을 들어 보니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가말리엘과 비교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과 몇 몇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


그러니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즉 권력자들입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가말리엘의 말은 순종할 만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죽이지는 않고 채찍질 하고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 후에  놓아 줍니다.


앞서서 사도들이 말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죽이지는 않고 채찍질하고 경고하여 놓아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혹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일 까 하여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럴것 같으면 채찍질 하지도 말고 놓아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하나님도 자신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혹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 해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을 순종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의 다른 말은 갈라디아서 1장10절에 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한다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름 아닌 율법, 즉 행함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행함. 살 이유가 있네, 사는 보람이 있네. 나도 신이 될 자격이 되네.

노력하면 할 수 있네. 구원이든 뭐든지 다 내 땀의 열매에 불과하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했다. 죽었다. 아프다. 좌절했다. 고난당했다. 절망했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정적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 많이 있죠.

왜 그럴까요?

그저께 어떤 사람이 이야기 했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다 부정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만하면 다 부정적이랍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

자기 몸 편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겐 부정적이라는 단어는 더욱더 강력한 자기 존재의 긍정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부정되어 져야 하는 삶이라는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왜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자신들이 죽어야 할 자들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사도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이 주님을 죽인 장본인이 됩니다.

그러니 저놈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사는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채찍질하고 놓아줍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입니다.


물론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우상하나님입니다. 거짓 하나님이죠.

철저하게 자기편, 즉 사람을 좋게 하는 하나님, 사람께 순종케 하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라 하면서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전 인생은 부정해 버립니다.

그러니 복음은 절대로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좋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인생이 주님께 온전히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인생이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생존으로 발두둥 치는 인생이 부정되는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좋게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딱 반대로 하죠.

사람에게 순종하는 복음, 사람을 좋게하는 복음.


만일 사람에게 순종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복음, 사람을 좋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하는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 이단 취급 받습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자들이 있죠.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다리 걸쳐야요.

사람에게도 순종하고 하나님께도 순종하고.

사람을 기쁘게도 하도 하나님을 기쁘게도 하고.


얼마나 멋집니까?

이렇게 되면 핍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존경이 따라 올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한번 가 봅시다.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일로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없었던 것 처럼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비참한 사실을 성도는 이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좋게 하는 말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교법사 가말리엘을 꿈꿉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


그래서 복음을 알더라도 가족에게 칭찬받으려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면 입을 꾹 다물고 지냅니다.

그러면 칭찬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오바댜처럼 비참함을 전해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자는 다 찍어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바댜가 그 시대에 인기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어겠습니까?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에돔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때려 죽일놈 아닙니까?


감히 우리나라에 부정적인 말을 하다니. 우리 나라가 망한다고,

당장 잡아 죽여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교법사 가말리엘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믿고 사람들로부터도 순종을 끌어 내고, 칭찬도 받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상 우리 마음엔 이것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오바댜는 어떠했습니까?


관심 없습니다.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만 관심있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주님되신 예수님께만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말을 듣게 됩니다.

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살았다. 그런데 내가 왜 싫은 소릴 들어야 돼.


이게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고 있는 마음, 본성이죠.

그런데 성도는 늘상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없이 여김당하고 욕얻어 먹는 일을 밥먹듯이 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 사도바울의 고백이 단 한사람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사람들을 좋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전인생을 부정하면서 십자가 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자로 사는 자입니다.

늘 사람들이 싫은 소리를 내 뱉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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