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강해

강해3

푸른 섬 2009. 12. 20. 20:25

그를 사를 것인즉

오바댜1장17-21

본문 1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꼭 이렇게 야곱족속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호와께서는 정말 피흘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창세기부터 한번 읽어 보세요.


처음에는 그럭 저럭 이지만 노아 홍수심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됩니까?

여덟 명 빼고 다 죽여 버립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물에 빠져 죽게 합니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자신들의 소유로 만든 땅, 그 땅이 가나안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있는 자들은 진멸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치 않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장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을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홍해에 몰살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그렇죠.

포학을 행한 에서 족속에게 불 심판이 임합니다.


그렇다면 구약만 그럴까요?


신약은 다를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 심하다고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이 불 심판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둘째 죽음, 잠시잠깐의 죽음이 아니라 아주 긴, 아주 긴긴, 영원한 죽음, 괴로움의 죽음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저를 이단이라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을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하나님이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교회다니는 사람 누구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살리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신이라면 우리 인간을 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수십년간 영혼을 살리기 위해 청춘을 바친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는 일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목사에게, 전도자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왜 복음을 전합니까?

구원하기 위해서죠라고 합니다.


다른 말 들어 본적 잘 없죠.

아니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들은 것이 전도란 항상 구원과 관련지어 배웠습니다. 그리고 심판이란 구원에 탈락한 자들이 받는 일이라 여겼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구약을 읽어 보면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과 심판은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는 결코 자리 바꿈을 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자리가 그러하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자리가 그러하고 에서와 야곱의 자리가 그렇습니다.


절대로 자리 바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구원의 자리 심판의 자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발악을 해도 그 자리가 바뀔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옥가야 할 자가 천국가고, 천국가야 할 자가 지옥 가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엉터리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합니까?


자리 확인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누가 구원의 자리에 있나, 누가 지옥의 자리에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 복음이 전파 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잔인한 하나님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됩니다.

즉 제대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시는 여호와 하나님처럼 제대로 예수님이 전파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보세요.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꺼집어 내지 않습니까?


51-52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에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 말은 곧 너희들은 불사름을 당할 대상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찔려 이를 갑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한마디 더 하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러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입니다.

스데반이 한마디 더 한 것이 왜 그들의 결단을 내리게 했습니까?


스데반 지는 하나님도 보고 있고 인자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은 안 보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스데반이 자신들과 구별해 버립니다.


난 보이는데 너희는 안 보이지.


그 말은 곧 너희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다. 아니 상관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인자,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고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전도를 참 희한하게 하죠.

우리들 같으면 어떻게 되었든지 좋은 말을 해서 설득을 해서 교회 나오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할텐데.

이건 전도하면서 무슨 애 다루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스데반은 뭐라고 말하면서 죽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더 열불나게 만들고 죽어 버립니다.

물론 스데반 자신은 성령님께 이끌리어 전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마는.


듣는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잘 죽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기도가 사도바울에겐 해당사항이 있게 됩니다.

희한하죠.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의 증인이었지만 즉 다른 말로하면 함께 돌로 쳐 죽인 자였지만 예수님께서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도바울을 만나주십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돌로 치는 현장에 있었던 사도바울은 스데반보다 더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가 성도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의 크나큰 분노를 사게 됩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서 복음을 전하니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뽑아 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뽑아냄을 입지 못한 자들은 지옥가야 마땅함을 선언하는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인간이든 뭐든 다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지옥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사람을 죽이시는 일을 예사로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할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 중에 사랑의 주님을 전하기 위해 죄 용서함을 받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전합니까?

주님되신 예수님을 전하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과감히 내 뱉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빠져 나옵니다.

동시에 지옥가야 하는 자들은 그들의 위치가 더욱더 확고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 뭡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피 흘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참 복음 전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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