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강해

강해 3

푸른 섬 2010. 7. 30. 09:30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2장1-20

그저께 예빈이랑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예빈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세다 말세.

우리는 깜짝 놀랐지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말을 배웠지.

 

내가 설교할 때 한 말은 아닌것 같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어디에 그 말이 나오니?

자신이 읽은 명성황후 책에 나온데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구박하니 말세다 말세라고 말했다나요.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불화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세를 가져오신 예수님이신가요?

 

사람들은 말세를, 즉 세상 끝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자신들이 생각할 때 이상하다 싶은 일들이

일어나면 말세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하더라도 그냥 말세,

세상의 끝이라고 말할 뿐 세상은 계속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종말이 속히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결코 거짓되지 않고,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묵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묵시는 정한 때가 있는 묵시입니다.

 

종말에 관한 묵시입니다.

묵시라는 말이 어려우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늘의 세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세계.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가 임하는데

그 맛보기로 바벨론의 멸망을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심판을 앞당겨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왜 멸망을 당하는 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심판의 이유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바벨론의 종말이 발생합니까?

 

4절을 보게 되면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이유는 마음의 교만과 정직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교만이나 부정직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5절을 보면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민을 모으나니.

술을 즐기는 것이 종말을 맞는 이유가 됩니까?

 

궤휼한 것 즉 간사하고 교묘한 짓을 하는 것이

종말을 맞는 이유가 됩니까?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탐욕대로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아니면 만민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것이 뭐가 문

제가 됩니까?

 

모든 것이 이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이 모습 아닙니까?

 

우악스럽고 사나운 모습, 자기 소유아닌 것을

모으는 것, 여러나라를 노략하는 일.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이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냐는 말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세상이 끝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데 깃들이려 하는 것(9), 아니면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것(9)은 어떻습니까?

 

여러 민족을 멸하는 것, 피로 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것, 이렇게 하지 않는 인간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다 다 이런 역사 아닙니까?

15절을 보게 되면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 내려하는 자,

주변에 얼마든지 볼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상 만들어 섬기는 것(18)은 어떻습니까?

식당에 가나 어디 가나 우상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상을 의지하는 것, 나무나 돌에게 비는 자들, 이런 것

 때문에 세상을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들이 이짓거리를 하면서 살아 왔습니까?

 

그런데 종말은 커녕 더욱더 세상은 이런 모습이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나며 확산되고 있죠.

 

물론 바벨론은 멸망당했습니다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합니다.

 

묵시라 해봤자 그냥 묵시일 뿐이야.

 

바벨론의 멸망이야 옛날이야기지.

 

그게 오늘을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상관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지자 하박국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바벨론은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당했죠.

그들이 믿었든지 믿지 않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이 멸망당했으니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심판을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멸망당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그것이 멸망당할 이유가 됩니까?

우리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는 일상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보시기엔 이 일상적인 모습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마태복음24장38-39절을 봅시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왜 멸망의 이유가 됩니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내 삶은 왜 이러냐고요.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데

 자신은 자꾸 술을 먹게 되고 나쁜 짓을 거부하지

않는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모르는고 하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심판의 이유임을 알지 못해요.

 

아직도 여전히 선악구조속에서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를 따지는 자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못한 자입니다.

 

40절에서는 더 이상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밭에서 뭐하겠습니까?

 

일하겠죠.

그런데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밭가는게 죄가 됩니까?

 

그래서 한 사람은 지옥갔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그러니 지금 문제점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왜 심판의 근거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한 쪽은 전혀 문제가 안되는데 한 쪽은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똑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밭가는데,

멧돌가는데 한 쪽은 심판의 이유로 작용하고 한쪽은

그와 상관없다는 것으로 작용합니다.

 

거기에 대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대답을 해 주고 계십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13-14절을 보겠습니다.

“민족들이 불 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그리고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20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 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 믿음이 없는

 쪽은 지옥 믿음이 있는 쪽은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일상생활로 표현합니다.

힘으로 표현합니다. 탐욕으로 표현합니다. 우상숭배로 표현합니다.

 

믿음 없는 인간들은 끊임없니 쏟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행위의 열매들입니다.

먹는 거 자랑하고 입는것 자랑하고,

마시는것 자랑하고, 시집가는 것, 장가가는 것

중요시하고, 밭가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믿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힘을 자꾸 의뢰하고 만인을 자기들에게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자는 어떨까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오직 믿음만을 내세울 뿐입니다.

 

13-14절을 한번 더 볼까요?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그득하리라”

 

결국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서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심판을 통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가 믿음이라고 했죠.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20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성전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피로 만납니다.

 

피가 없으면 그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어도 심

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라는 기준을 갖고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믿음이란 결국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피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러나 이 피와 상관없는 자가 악인이며

 이런 자는 자신의 행위만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믿음으로 삽니다.

 

로마서1장17절을 보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자기 것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떻습니까?

정말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자신들의 삶의 열매를 주주룩 흘려냅니다.

 

의인은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그러니 의인의 삶은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됩니다.

 

조롱거리가 됩니다.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는 미움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살 뿐이지만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들이기에 바벨론처럼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냥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냥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은 그냥 남들이 보기에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그들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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