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강해

강해 4

푸른 섬 2010. 7. 30. 09:34

부흥

하박국3장1-19

여러분, 성도답다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이 떠 오릅니까?

어떤 모습이 성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가 항상 직면하는 문제가 이것 아닙니까?

너 성도답니?


너 성도라면서 왜 그렇게 사니?


이런 정죄를 끊임없이 듣고 살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정죄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은 그런데로 이해가 되지만, 내 속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는 사실에 우리는 힘이 빠집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내 자신을 볼때 변화 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끊임없는 정죄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8장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자꾸 우린 정죄속에 빠져 듭니까?


그야 당연합니다.

로마서 8장1-2절이 예수님 믿을 때 한번만 보고 찢어 버리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한 이 말씀은 계속에서 성도에게 해당사항 있음이 됩니다.

그래서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정죄가 자꾸 흘러나오나 생각하시지 마시고,

정죄가 자꾸 흘러 나옴으로 말이맘아 로마서 8장1,2절 말씀이 생명이 말씀이 됨을 감사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는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행하고 하지 않고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육을 입고 살아가는 한 이것은 반복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여전히 우리가 읽지 않아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소위 수많은 말씀 하나 하나가 쉽게 보아 넘겨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엄중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제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린 또 뒷걸음 치려고 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있지 마옵소서”


지금 선지자 하박국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보통 기도라고하면 우린 어떻게 기도합니까?


내 바램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선지자처럼 구하는 기도 보셨습니까?


무슨 내용이냐고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해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진노입니다.


심판입니다.


이 수년내에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대상이 남 유다와 바벨론 모두를 포함합니다.


자신이 속한 유다나라와 바벨론 모두를 하루빨리 심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지 말아라.

바벨론만 심판해 달라고 기도해야지 자신이 속한 남유다는 아니지 않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꺼내듭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여기 말씀에 의하면 남유다는 제외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도 다 말씀에 합당하게 되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주님 우리 집안 식구들 빨리 심판해 주세요.


저들 빨리 지옥보내 주세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하겠습니까?

저 미친놈.


자기 식구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야하는 자들의 주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결코 자기 자신이 속한 남유다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을 규정할 때 남유다라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14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가난한 자가 곧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명목상 남유다나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가난한 자들이 곧 주님의 백성이요 이들이 유다, 참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선지자 하박국이 남유다를 위한 것 같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언약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나라고 자신의 가족이고 없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에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고 없습니다.


오직 무엇만 있습니까?


자신의 몸,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직장, 자신의 기업, 자신의 국가만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해 주옵소서라고 하겠죠.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처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부흥케 해달라고 하겠죠.

잘 살게, 건강하게, 부유하게, 세계 만방에 뛰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 하박국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가면 이 구절 많이 써 놓았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알아도 그 뜻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교회 부흥케 해 달라고, 사람 많게 해 달라고 이 말씀을 인용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말씀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자 그러면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는 선지자 하박국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요?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악인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 선지자 하박국은 군림하는 자로 살까요 아니면 어떻게 살까요?


사람들은 또 착각을 합니다.

선지가 하박국이 얼마나 당당하게 기도합니까?

그런게 그렇게 기도하는 자는 어떻게 삽니까?


가난합니다. 

17-19절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자신의 기도로 바벨론이 쳐들어와 자신이 사는 곳을 황폐케 해 버립니다.

그러니 선지가 하박국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이 기도했으니 그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이 심판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기도했으니 자신은 그 심판의 자리에게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만은 심판을 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그 소용돌이치는 전쟁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도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없습니다.


정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16절을 한번 볼까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엄청난 고통속으로 빨려 들러 갑니다.

뼈가 썩는 고통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죠?


주님께 기도하여 심판해 달라고 했던 그 당사자도 이런 고난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무엇을 보여 줍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냥 나 믿어요. 예수님 믿어요. 이렇게 사는 자가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몰려 지게 되는고 하면 가난속으로 내 몰려 집니다.


뼈가 썩는 고통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무엇을 드러냅니까?

바로 17-19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런 미친자의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가 다 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죄함이 없던 바울이나 베드로, 스데반집사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했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늘상 죽음에 넘기우는 삶을 살면서도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처럼 주님은 자신들의 힘이시며, 자신들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자신들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 삶은 마치 선지자 하박국이 살았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 빨리 오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게 됨으로 우린 가난으로 내 몰립니다.


제가 가난이라는 표현을 써니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무화가 나무의 열매가 없으면 못삽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삽니다.


죽는다고 덤빌 것입니다.

백수로 살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벌이가 시원찮으면 난리가 납니다.


이런 것을 염려하면서 주님은 전혀 저들에게 힘이 안됩니다.

이들에게 부흥은 무화과 나무 열매가 가득가들 달여 있고, 외양간에 소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통장 잔고가 가득가득하고, 아파트도 몇 채 있고, 자식공부 잘하고, 건강한 것이 부흥입니다.


이들에겐 교인 수 많은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은 동화속 주인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떨까요?

정말 선지가 하박국이 기도한 것 처럼 이런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이야 말로 믿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판 받아야 할 자와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기도 해 봅시다.
주여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는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며, 돈이 없고, 건강 없고, 백수로 놀아도 여호와로 인해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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