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스가랴 강해 3

푸른 섬 2010. 11. 7. 17:57

네 뿔과 공장

스가랴1장18-21

세상은 항상 둘로 나누어집니다.

착하냐 나쁘냐. 선하냐 선하지 않느냐?

 

자녀들을 양육해 본 부모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누가 우리 편이냐? 즉 누가 선한 편이냐?

 

누가 악당이냐?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늘 편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보기에 그곳이 옳다고 여기기에

 그 편을 들것입니다.

 

우리도살아가면서 어떤 사건에 부딪히면

 어디 내편 없는가 찾게 됩니다.

 

특히 억울하다고 생각 될 때에는 더더욱 그런 편을 찾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욕망 중에 소속의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참 희한한 욕망이죠.

 

어딘가에 소속될 때 비로소 안심합니다.

 

그리고 이 소속된 곳은 항상 선한 편이 되고,

항상 옳은 편이 됩니다.

 

자신이 소속된 곳이 잘되고 성공한다면

자신이 소속되지 않는 곳이 잘 되든 잘 되지 않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일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교통사고를 목격하죠.

 

어떤 경우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 많은 경우 안타까워하고 아니면 욕하든지 합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당한 당사자는 어떨까요?

 

그 가족은 어떨까요?

여러분 중에 가족과 같은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안 좋은 소식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남의 일입니까 나의 일입니까?

 

이러한 모습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들, 즉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니 벌칙게임을

하는데 게임시작과 함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

게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웃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의 삶이 그렇죠

. 나만 아니면 됩니다.

내가 속한 곳만 아니면 됩니다.

 

그러니 나와 상관없는 자들이 죽든, 망하든,

억울한 일을 당하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와 상관있는 자들에게서 죽는 일,

망하는 일, 억울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이렇듯 세상은 언제나 둘로 나누어집니다.

 

내가 속한 곳과 내가 속하지 않은 곳.

내가 속한 곳은 언제나 정당성을 갖게 되고

내가 속하지 않는 곳은 상대적이 됩니다.

 

월드컵 같은 축구경기를 볼 때 자신이

응원하는 나라가 없으면 그냥 재미로 보죠.

 

그런데 자신이 속한 나라가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죽을 판 살판 응원하죠.

이게 인간입니다.

 

목사라고 이런 마음 없을까요?

이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편을 가르는데 좀 다르게 가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과 그 헤치는 뿔.

 

이 둘로 나눕니다.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네 뿔은 뿔로 묶을 수 있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과 그 백성을 헤친 뿔.

 이 둘로 세상은 나누어집니다.

여기에 우리 개인이 들어갈 자리가 없네요.

 

우린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속으로 들어가면 되잖아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아브라함의 선택이 아브람이 원해서 되었습니까?

 

이삭과 야곱이 자기가 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까?

 

처음부터 줄이 다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뿔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네 뿔이 뭐라고 합니까?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라고 합니다.

뿔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잘 나옵니다.

 

다니엘8장3절에 보면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가에 두 뿔 가진 수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도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더라”

 

4절도 봅시다.

“내가 본즉 그 수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으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20절에 보면 이 두 뿔가진 짐승은 메대와 바사 왕들이라고 합니다.

수양 후에 숫염소가 또 등장합니다. 그 숫염소는 헬라 왕입니다.

쉽게 말하면 왕으로 대표되어지는 나라를 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뿔로 표현합니까?

뿔에 힘이 있으니 뿔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8장9-12절을 봅시다.

“그 중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 것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와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강력한 힘을 가진 짐승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과

 그 해석에서 다 말씀되어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이 무엇입니까?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모양이 어떻습니까?

 

머리는 정금, 가슴과 팔들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그 종아리는 철,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진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립니다.

 

철과 진흙, 놋과 은,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을 꾸었습니다.

바벨론을 정점으로 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나라들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우상의 나라는 멸망당하고 영원히 설 나라가

 만들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말씀대로 되어졌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또 꿈을 꿉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 다름

아닌 짐승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은 짐승처럼 일곱 때를 살게 됩니다.

이 둘이 합쳐진 것이 바로 뿔 달린 짐승,

즉 뿔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네 뿔은 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벨론 속에 대 포함된 나라들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네 뿔을 보았고 이들은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헤친 뿔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등장합니까?

공장이 등장합니다.

 

이들 네 명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21절에 나옵니다.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네 명의 공장은 유다를 헤친 자들을

다른 뿔로 심판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스가랴 선지자가 본 두 번째 환상 끝입니다.

이것을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유다를 헤친 뿔들이 있다. 이들을 네 공장이

 활동해서 다른 뿔을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한다.

이것이 오늘 환상의 내용 아닙니까?

 

뭘 해석합니까?

주님께서 이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뭘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제가 설교 서론에서 편 나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둘로 나누십니다.

 

한쪽은 가해자, 한 쪽은 피해자.

피해자는 유다고 가해자는 짐승입니다.

 

이 짐승을 심판하시는 분이 네 공장입니다.

 물론 그 도구는 다른 뿔들, 다른 짐승입니다.

물론 심판을 다른 짐승이 유다를 헤친 뿔들을 멸한다고 끝나면 안 되겠죠.

지난주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땅의 일이란 항상 주님나라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말입니다.

유다를 헤친 짐승에 대한 심판이 분명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둘로 쫙 나누어집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러면 유다가 피해자가 되는데 왜 피해자가 됩니까?

 

우리가 보기에 유다는 ,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은 죄를 범해서 멸망당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유다가 피해자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왜 그들 편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이 유다를 뒤덮고 있습니다.

언약이 반드시 유다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짐승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겉보기에 멸망당하고 심판당하는 모습으로

 보이니 자기들의 멸망과 동일하게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다의 멸망은 멸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 가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행동대장들입니다.

 

짐승들이 이것을 알 리가 없지요.

이렇게 함으로 짐승들을 반드시 언약에

기준하여 심판하시는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 유다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니 짐승이지요.

 

요즘은 짐승을 좋을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짐승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피해자인 유다가 그 유다가 아님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밝혀집니다.

 

피해자는 언약을 이루시는 주님 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피해자인줄 또 착각한 것이지요.

어렵지요.

 

미꾸라지처럼 자꾸 쭉쭉 빠져나가버리니

 잡을 수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요한복음1장11절을 봅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오히려 유대인들은 자기 땅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자기 땅을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요한복음 11장48절입니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자기가 속한 것을 사수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짐승들이 하는 짓 아닙니까?

마태복음26장51-54절을 봅시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은 힘을 의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라는 나라도, 수많은 뿔들도 모두가 다

 언약을 이루시는 분, 그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하는 제자조차도 짐승임을

 드러내심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제대로 전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은 누구를 헤칩니까? 유대를 헤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습니다.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베드로나, 다른 모든 자들,

나라들,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다 짐승이었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확정된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님 되심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 주되시는 주님, 영생으로 인도할 자는

주님의 피로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지옥 보낼 자는 주님의 피를 근거로 지옥 보내십니다.

이것을 확정하시는 과정이 구약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미리 환상으로 잠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나누어 집니까?

 

나를 기준으로 나누어집니까?

아닙니다.

 

피를 기준으로 나누어집니다.

피가 뿌려진 자들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피뿌림을 입지 못한 자들은 지옥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피 흘리심으로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들입니다.

갈라디아서6장1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3절도 볼까요?“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두 종류의 자랑이 나옵니다.

하나는 육체의 자랑 다른 하나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여러분 이 땅에서 어느 것이 더 잘 먹힙니까?

 

교회에서 어느 것이 잘 먹힙니까?

기도 많이 한 것, 전도 많이 한 것, 간음하지 않은 것,

 성추행 하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이 잘 먹힙니까?

 

아니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뭘해도 죄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할 뿐입니다가 잘 먹힙니까?

이렇게 세상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쪽과 자기 자랑하는 쪽으로 말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들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조롱하죠.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당당합니다. 기도많이하고,

전도 많이하고, 성도 많고, 헌금 많이 하고,

간음 안했고, 돈 안 떼먹었고,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둘로 나누어져서 주님되신

예수님을 각자의 역할대로 충심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아니면 육체를 자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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