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애통
스가랴12장10-14
요한복음19장34절을 보면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자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꺾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버렸습니다.
그러자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이 읽은 스가랴 본문과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런데 좀 맞지 않죠.
창으로 찔렀는데 이들에겐 통곡이 없습니다. 애통이 없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이들에겐 전혀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눈으로 목격한다고 해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오히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을 , 예수님을 찌른 자는 별 생각이 없습니다.
애통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군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냥 구경꾼일 뿐입니다.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는데 그 애통이 독자를 잃은 애통, 장자를 잃은 애통과 같다고 하십니다.
출애굽기12장30절을 보면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이런 통곡을 그 찌른 자들이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있는 자들은 전혀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찔러 죽인 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씀은 어디와 연결해야 합니까?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분명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창에 찔리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용이 맞지 않지요.
이것이 말씀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분명 찌른 자에겐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피해가 버립니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의 기대대로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1-14절을 보면 온천지가 애통한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는, 창에 찔림을 당하셨을 때에는 이런 애통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5절을 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찔리심이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스가랴12장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을 때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육의 눈으로 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마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스가랴 말씀대로 찔려 돌아가셨으니 애통하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마치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가 죽으면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장자가 죽으면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죽으면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으면 어떤 마음일까?
그래 그런 마음 아니겠어?
스가랴 말씀도 독자를 잃은 슬픔, 장자를 잃은 슬픔, 그러한 통곡을 한다고 했지 않는가?
그래 예수님의 죽으심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야!
그러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쥐어 짜내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예수님을 찔러 죽였다고도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이 그러하니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참으로 주님께서 주신 애통의 마음 , 통곡의 마음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런 것은 겉으로 구분하기 힘들지요.
성령 받은 자와 받지 않는 자가 살아가는 삶의 양식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던 저들은 말씀을 자신의 힘으로 믿어 보려고 하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삶에서 나타내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말씀을 육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단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도무지 개입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예가 바로 창으로 찔렀는데, 그 찔림을 보았는데 애통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요.
그래서 눈으로 보면 믿겠다고 덤비지요.
요한복음20장19-20절을 봅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참 재미있지요.
그냥 보아도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꼭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셔야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이 더 잘 아시지요.
이게 육에 속한 인간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그냥 부활해도 믿을 생각안합니다.
꼭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육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는 것이지요.
이 마음을 주님께서 다 아시지요. 그래서 미리 먼저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건 제이야기가 아닙니다.
25절을 봅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게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도마가 그 대표자로 나서고 있지요.
그런데 손에 넣어 본다고, 옆구리에 넣어 본다고 믿어질까요?
그 믿음은 여전히 육에서 육으로 흐르는 믿음입니다.
가짜 믿음이지요.
이런 믿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의 영으로 난 자만이 갈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는 인간이 경험하고 체험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냥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복 받은 자들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입니다.
즉 육으로 경험하고 체험하고 믿는 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지요.
찌른 자가 애통한다는 말이 그 말씀대로 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사도행전으로 넘어 가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행전2장37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전하니 이들에게 애통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겠다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린 정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말입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사도들이 말했듯이 믿으라고 하면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믿음이 그런 식으로 믿어집니까?
38절부터41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이미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주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 즉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너희들이 아무리 고함치고 소리 지라고 간구하여도 성령 받을 수 있다 없다.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물론 세례라는 것, 회개라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짓입니다.
그러나 죄용서와 성령은 사람의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손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은 삼천이나 되었지요.
받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는 자들, 죄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하죠.
이들은 성령을 속여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얼마든지 포착될 것 같지만 쭉쭉 빠져나가 버립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이들은 자신을 누구로 간주합니까?
예수님을 죽인자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을 찌른 자로 간주합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십자가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편합니까?
스가랴 말씀대로 주님께서 일하시는구나 라고 이해할 터인데 이미 예수님은 지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우편에 계십니다.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었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다고 전하니 어찌할꼬 탄식합니다. 애통합니다.
이들은 십자가 현장에 없었습니다.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을 찌를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그 현장에 있는 자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창을 든 자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로 간주합니다.
왜 그럴 까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어찌할꼬라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여호와가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 주님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셨기에, 간구하는 심령을 주셨기에 이들은 자신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행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미 십자가를 거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십자가를 아직도 전면에 내세웁니까?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까?
십자가는 과거일 뿐이요 이제는 십자가를 믿는 삶이 있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삶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난데없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우리의 신앙경험에 의하면 십자가는 과거 아닙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성도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교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왜 율법의 행위를 내세울까요?
자신들이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으니 당연히 자신들은 그 믿음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니 날과 달과 절기를 힘써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한 자의 태도라고 합니다.
아들 아니면 뭐니까? 종이지요. 지옥갈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4장을 보면 전혀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5-9절입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주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니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4장10절 말씀의 삶의 모습과 로마서 14장의 삶의 모습은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지요.
로마서 14장은 십자가에 눈앞에 밝히 보이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4장의 모습은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삶과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 자의 삶의 모습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하는 내용이 다르지요.
한쪽은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다른 한쪽은 삶을 자랑합니다.
스가랴12장 말씀은 계속해서 쭉 그대로 일을 하십니다.
활동하십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입니다.
그러니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주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장7절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지금까지 말씀에 의하면 이미 성령 받은 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에는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주님을 눈으로 봅니다.
자신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땅에서 살 때에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애통함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애곡하게 됩니다.
마태복음25장31-46절을 보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두 부류가 나옵니다.
양과 염소입니다.
양은 천국, 염소는 지옥입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의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먼저 양들과 임금과의 대화를 봅시다.
35,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임금이 이렇게 말하니 천국 갈 양들이 뭐라고 합니까?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반문하지요.
그러자 임금이 4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 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제 지옥 갈 염소들을 봅시다.
임금이 뭐라고 합니까?
양들에게 한 말을 똑 같이 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이 다르지요.
너희는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똑 같은 행위를 언급합니다.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소가 뭐라고 합니까?
언제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반문하지요.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뭐라고 합니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면 우린 또 이렇게 덥빕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심판대 앞에 설 때 이렇게 말하겠지요.
저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누구의 말입니까?
영벌에 들어갈 자들이 한 말 아닙니까?
영벌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않을 자는 행위에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만 차이가 나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 자인가 아니면 이 십자가를 뒤로 , 아니면 옆으로 밀쳐 버린 자인가로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입은 자는 십자가가 항상 눈앞에 보이는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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