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 17

푸른 섬 2011. 3. 6. 16:54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스가랴13장1-6

1절에 나오는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마치 에스겔 47장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1절에서 1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항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측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 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리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조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마치 천지창조를 보는 듯 합니다.

물론 다른 점은 성소 동편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 물은 생명수입니다.

살리는 물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수는 피해갈 곳은 반드시 피해 가 버립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흘러 내립니다.

요한복음 7장37-39절을 봅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은 곧장 우리를 요한복음 4장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영생수를 주실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를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2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47장의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온전히 이루심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의 일은 영생줄자와 영생주지 않을 자를 철저하게 가려 내 버립니다.

영생줄 자에겐 성령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겐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돌아서 버리게 만드십니다.

요한복음10장 3절에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무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영생수의 혜택은 아무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참으로 얄밉습니다.

예수님이 미워요.

영생수를 주시려면 그냥 주시지 왜 하필 혜택입지 못하는 자들을 꼭 만들어 내시는가 말입니다.

생명수를 그냥 온 세상에 다 흘러넘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죽은 땅을 만들어 내고야 맙니까?

다시 13장 1절로 가 봅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기도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듣는 유다 기분 좋지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떨까요?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다윗의 족속이 뭔데, 예루살렘이 뭔데 그들에게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 말인가?

에베소서2장12절을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합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현주소입니다.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의 혜택은 본래 볼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정했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정하셨습니다.

약속의 언약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소망도 없이 지옥가야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하지 않습니까?

단지 유다백성이 아닌 이유로 지옥가야 한단 말인가?

소망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 조상들 중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이 다 소망 없던 자였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습니다.

결정권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이방인에게도 혜택이 돌아 가죠.

물론 이 혜택도 제한적입니다.

로마서8장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완벽하게 홀로 다 끝내 버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자 다시 스가랴 13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릴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여기에 별로 관심없죠.

오직 관심은 그다음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이게 인간 아닙니까?

늘 내일을 생각하는 인간.

그러니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다음은 다음은?

늘 이런 질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주님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다 아시고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2절이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 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 옷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무슨 말인지는 아시겠지요.

확끈하고 분명하게 뒤처리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우상 제거. 거짓 선지자 더러운 사귀 제거.

거짓 예언자는 낳은 부모가 칼로 찔러 죽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고 거짓선지자 노릇하는 자도 입을 꾹 다물게 된답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 아닙니까?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큰소리치며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까?

오히려 죄용서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두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라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생명수를 부어 주셨습니다.

일어 어떻게 진행됩니까?

초반엔 마치 스가랴 13장 말씀의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완전히 용두사미입니다.

시작은 거창하게 했지만 끝은 흐지부지 하게 끝나버립니다.

오히려 죄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고 죽습니다.

요한계시록12장11절을 봅시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김의 방식이 희한하지 않습니까?

죄용서의 샘물이 터지면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이 살고 오히려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용서의 샘물이 터지니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은 죽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죽인 자들은 살아 남았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어린양의 피때문입니다.

우린 어린양 피 다음을 늘 생각하고 구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누구를 죽일까요?

어린 양의 피를 증거하는 자를 죽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이 도대체 뭐라고 증거했길에 죽임을 당했을까요?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이 왜 사람에게 살인 본능을 일으키게 합니까?

죽은 자의 대표자 스데반 집사님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사도행전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왜 살인 본능을 발동시켰는지 잘 나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냥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나열해 놓았지요.

그런데 그 역사 속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그들 조상의 죄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전 메소보타미아에 있었다고 하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는 분?

여호수아24장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라고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설교를 듣는 너희들도 원래는 우상 숭배자였다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지요.

듣는 사람 상당히 기분 나쁘겠지요.

9절을 봅시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여러 조상이라는 말이 등장하죠.

이 조상이 누구 조상입니까?

바로 스데반 설교를 듣는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요셉을 시기하여 판 조상의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도 똑 같은 놈들이라는 말입니다.

모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35절입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참으로 미운 말은 골라가면서 합니다.

스데반 선지자가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거절하던 모세라는 말을 집어 넣음으로 너희가 그런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라고 합니다.

좀 작작 하지.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너희들은 무얼했다.

송아지 우상 만들어 우상숭배했다고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무로 돌아가 버린 상황입니다.

사십년 광야생활동안 우상숭배했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맞아 죽을 짓을 골라가면서 합니다.

51-53절을 봅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여기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그 일당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54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때 스데반 집사님은 더 불을 지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해 버립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죽여 버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린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 숭배자였다는 말입니다.

결국 선지자를 죽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말입니다.

누가 말입니까?

바로 인간들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지금 주님이시라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죽였습니다.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분 나쁩니까 안 나쁩니까?

안 나쁘지요.

왜 그렇습니까?

나의 조상이 아브라함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만일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를 언급해 봅시다.

당신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상 숭배자였고, 어머니도 그러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분 어떻습니까?

아직 감이 안 옵니까?

그러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히 천국갈 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 어머니는 지옥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 하늘 우편에 계신 주님 되신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기분 안 나쁩니까?

유대인들은 지금 스데반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숭배자다. 우린 주님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다.

주님의 피가 아니면 우린 소망없다라는 것을 전하면 상대가 서서히 화를 내지요.

왜 그럴까요?

자긴 십자가를 지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할까 준비 중인데, 믿고 구원받은 자신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고 하니 어떻겠습니까? 기분 상당히 나쁘겠지요.

이런 사람 많이 보고 만납니다.

이런 사람은 온 세상이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설교에서 빼버립니까?

아닙니다.

자신도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스가랴 13장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성도를 십자가에 가두어 버리니 말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성도를 밀어붙입니다.

오히려 성도가 죽임을 당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이 더욱더 힘을 발휘합니다.

십자가만 전하는 성도는 미움을 받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에 씻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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