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19

푸른 섬 2011. 3. 22. 20:33

여호와의 날

스가랴14장1-21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에서 여호와의 날이 어떠할 것을

이미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일들을 한번 볼까요?

 

1절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절에는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절에는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5절에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6,7절입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

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10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절“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12,13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15절“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19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고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20절 “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많은 일들이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 보니 세상끝날이 한 사건으로 끝나지가 않습니다.

한셑트로 묶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뉴질랜드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일본에서도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목사들은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가깝다고 합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요.

우리인간들이 느끼기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열방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오히려 열방의 배후 세력을

 사로잡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승리로 자기 백성들은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지진이 일어날 때, 쓰나

미가 덮쳐 올 때 피하는 사람의 행세를 합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성도의 모습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금방 알 수 있죠.

 

쓰나미로 모든 것이 떠내려 가버리고 폐허가

된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 보셨습니까?

성도의 모습이 세상에서는 그런 꼴이랍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전쟁에 개입하셔서 열방을 치셨는데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 꼬라지가 너무 초라합니다.

고린도 전서4장9-13절을 한번 봅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우리가 기대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듯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보이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한꺼번에 심판하시고 성도를 높이 드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본지진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좀 속 시원하게 일을 처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와 함께 하는 거룩한 자의 모습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답니다.

주님은 분명 십자가로 승리하셨는데 성도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어린이 여러분은 어떤 가요?

이런 삶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당연히 싫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었으면 14장 21절

 말씀과 같이 가나안 사람이 다시 없는 세상.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있는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좀 대우를

 받는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대우 받는 자리, 힘을 가진 자리에 있습니다마는.

물론 이들은 말씀에 의하면 모두 참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아닙니다.

 

이들은 너무나 깨끗하고 만물 중에 고귀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말씀과 상관없는 자들이요 거룩한 자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도가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키시는데 너무 일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을 하실 때 사람과 의논하시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단지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한쪽은 저주받는 쪽입니다.

다른 한 쪽은 피하는 자들입니다. 즉 주와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는 쪽에 살게 됩니다.

 

다른 한 쪽은 철저하게 저주와 재앙 속에 살게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주와 축복으로 나눕니까?

욥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왜 재앙이 닥쳤습니까?

 

땅의 사람들은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야 알지요. 욥기를 읽어보면 나오니 말입니다.

 

1장 6-8절에 보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여호와께서 먼저 사단에게 욥을 자랑합니다.

그러자 사단이 뭐라고 합니까?

 

9-11절입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당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의 말이 놀랍지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땅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땅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이지요.

이것을 치면 욥이 주를 욕할 것이라고 장답합니다.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유물을 뺏어가는 것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사단이 심부름꾼 같이 행세를 하지요.

욥이 재앙을 받은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피와 관련 있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피와 관련 있다는 말은 곧 죄와 관련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시발점이 되셔서 사단의 제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내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물론 일차전은 여호와께서 승리합니다.

그렇다면 이차전은 어떻게 벌어집니까?

 

2장5절에 보면 사단이 욥의 뼈와 살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할 것이라 장담하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쪽으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욥의 세친구가 등장합니다.

욥의 세친구는 욥이 왜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이들은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은 고난이 죄를 지은 결과로 일어나는 일로 간주합니다.

하늘의 일을 모르니 땅의 일을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 받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쁜 짓 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결론을 보면 욥이 왜 고난 받았습니까?

이미 서론에도 나오지요.

 

사단과의 내기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단지 그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내기는 결국 욥을 세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괜한 고난이 아니라 세친구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친구의 죄를 제대로 끄집어내고, 즉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우상숭배였음을 밝히셨습니다.

이들의 죄를 위해 욥이 번제를 드립니다.

 

욥기42장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단과 일을 벌이시니

 땅에서는 우상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고개를 쫘 내민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욥의 재앙이 재앙이 아닙니다.

 

정말 재앙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전능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다는

 자들에게 죄용서함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혜택이 누구의 뜻대로 주어졌습니까?

여호와의 뜻입니다.

 

이것은 욥의 세친구의 뜻이 아닙니다.

욥의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벌이시는

일에서 놀라운 죄용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사람이 있지요.

 

이 사람은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이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완전 일방적입니다.

 

초막절이 나오지요.16,18,19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7장에 초막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39절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이 무슨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성령을 주십니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 주신 자들만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에겐 저주가 퍼부어 집니다.

스가랴식으로 표현하면 12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신약식으로 표현하면 잘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가 정말 스가랴식의 꼴이 되면

 우리 기분이 좋을 텐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만물의 찌끼와 조롱거리가 됩니다

.

그러나 이런 모습이 주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자랑은 어린양의 피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이 자랑하고 싶어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내몰리는 것이지요.

 

자신은 나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사용됩니다.

동시에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것을 그대로 다 쏟아 냅니다.

 

그러나 그 쏟아 냄이 자신들의 죄를 쏟아내는 것이 됩니다.

이들은 정말 막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십자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받은 자의 삶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못한 자는 막 쏟아 내면 죄밖에 안 나옵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리지요.

이것 때문에 성도는 고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쓰나미를 피해 도망하는 자와 같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의 주되심의 증거입니다.

 

스가랴14장9-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요한계시록 21장2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이 신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기대하는 종말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우리들의 기대를 피해가는 종말입니다.

 

*www.woorigarak.org 로 오시면 동영상, 음성설교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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