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같은 족속
스가랴 12장1-9
예루살렘은 열국의 적이 됩니다.
천하만국의 적은 예루살렘입니다.
이들은 힘을 모아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여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이들을 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은 천하만국에게 무거운 돌이 됩니다.
이 돌을 들려는 자는 크게 상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이 몰고 온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쳐서 미치게 하십니다.
유다 족속은 여호와께서 돌아보십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국민의 말을 치셔서 눈이 멀게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유다 족속들은 심중에, 마음으로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날에는 유다 두목들이 나무가운데 화로 같고, 곡식단 사이에 햇불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갑자기 약간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유다장막을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이유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면서 8,9절에서는
“그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말씀을 조금 쉽게 풀어 보았습니다.
주 내용은 모든 열국이 예루살렘의 적으로 예루살렘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히려 예루살렘이 이들을 다 불살라 버릴 것을 말씀하시지요.
단 유다장막이 그 중심에 서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 입장에서 장차 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결정하신 상황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천하만국을 싸움붙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하만국과 예루살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천하만국이 이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 이긴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이들을 불살라 버린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말입니다.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하만국이 예루살렘과 붙어서 불살라졌습니까?
이런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은 구라입니까?
거짓말입니까?
허풍입니까?
이게 성경을 읽은 우리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좋겠지요.
그런데 정말 좋겠습니까?
믿어져야 좋지요. 자신들의 상황을 볼 때에는 단지 희망을 주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삶은 팍팍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그것은 분명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을 해 버리시지요.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이 부분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사도행전4장23-30절입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여기에 보면 천하만국과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의 군왕들입니다.
열방이 나옵니다.
시편2편 말씀의 인용 구절이지요.
이 말씀대로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말씀과 좀 다르게 나오지요.
분명 예루살렘으로 나오고 유다로 나오는데, 천하만국이 누구를 적으로 둡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천하만국이 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오버해도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닙니까?
단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제사장들 등인데 이들은 세상의 군왕들, 열방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과장해도 너무 과장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자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상황을 그렇게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죠.
문자적으로 해석해 봐야 미친 사도들로밖에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자들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일당을 규정할 때 세상의 군왕들로, 열방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이곳에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이 적들로부터 공격당한다고 했는데 그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열방이, 세상의 군왕들의 짓이라 규정합니다.
그러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빗나갔습니까?
그렇지 않죠.
사도행전 2장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한 짓을 어디까지 쭉 이어버립니까?
바로 사도들이 핍박받는 것같이 이어버립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받는 핍박을 예수님을 죽인 열방과 군왕들의 행위와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받는 핍박이 자신들의 핍박이 아니라 예수님의 핍박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 이제 스가랴 본문에서 한 가지는 해결했습니다.
천하만국이 예루살렘과 싸운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적개념이라는 것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분명 스가랴서에서는 누가 승리합니까?
누가 횃불이 됩니까?
예루살렘이지요.
유다가 횃불로서 천하만국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스가랴 말씀이 실패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육의 눈으로 보면 분명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2장15절에서는 달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본문이 좀 어려우니 쉬운 번역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하늘의 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말씀이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분명 실패인데 오히려 세상의 군왕들의 배후 세력까지 사로잡아 승리하셨다고 하십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세상의 군왕의 승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십자가가 오히려 승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횃불로서 저들을 태운다는 것은 완전 역전된 말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고난 받고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이 오히려 저들을 불로 태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한 말씀 아닙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저에게 어떤 분이 이렇게 반박하실 것입니다.
목사님 제발 말씀대로, 성경에 적힌 대로 봅시다.
왜 그렇게 무리하게 해석하고 끼워 맞춥니까?
제가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렇게 끼워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코스였다는 말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횃불의 의미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심판의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곧바로 횃불의 역할을 해 버립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하만국의 승리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십자가로 인해 지옥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이들에겐 무거운 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저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도만 알아 먹는 말씀입니다.
성도 아닌자는 성경말씀을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횃불이니 십자가가 무거운 돌이다라는 말씀은 성령 받은 자만 아는 말씀이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제 성도로 넘어 가 봅시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 사도행전 2장을 보면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자신들의 핍박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함으로 받는 핍박을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건방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감히 자신들이 받는 핍박과 예수님의 고난을 같은 것으로 보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교만한 것이 아니지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성도는 주님의 몸 아닙니까?
고린도전서12장27절을 보세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성도란 그리스도와 별개가 아닙니다.
처음 알았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이 보는 관점이 정확한 관점입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핍박은 당연히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과 동일한 것이지요.
자신들의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왜 사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했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이 왜 사람들을 열 받게 만들었습니까?
그야 당연히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죄를 지적질 했기 때문이지요.
죄를 지적질 하니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믿어진다면 속이 시원할 것인데 상당히 기분 나쁘지요.
그러니 핍박하고 죽여 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또 정신 나간 자들이 자신을 존귀히 여기려고 덤벼 덥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냐고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귀새끼들입니다.
제가 마귀새끼라고 표현하면 또 누군가 목사가 어떻게 그런 저속한 단어를 사용하느냐고 덤비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발성경좀 보세요. 도 닦지 마시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 지체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전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 전하기 때문에 성도는 놀랍게도 주님의 고난을 계속해서 발생시키게 됩니다.
십자가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코스대로 간다는 말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도를 우습게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 우습게봅니다.
우린 죄인이며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면 비웃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이라는 소리가 싫은 것입니다.
죄인 죄인이라고 늘 말하고 인정하는 것 같지만 자신은 그래도 아주 약간은 덜 죄인이라는 마음이 들어 있죠.
그래서 이들이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 봉사, 헌신, 헌금 등등을 내세웁니다.
아니면 목회경력을 내세우지요.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누구를 핍박할까요?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즉 성도를 핍박하죠.
그런데 이 핍박이 저들에겐 무엇이 됩니까?
무거운 돌로 작용합니다.
불로 탈 횃불로 작용합니다.
얼마나 놀랍고 두렵고 무섭습니까?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자는 지나 개나 다 똑같다고 여깁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사도들을 볼 때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습니까?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옥에게 가두고 핍박도 하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짓이 누구를 핍박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입니까?
바로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의 몸의 지체를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 되신 예수님이 심판하실 횃불 되심을 온 천하에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듣게 되면 자칭 성도라 생각하는 자들은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봐라 너희들 까불지 마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오히려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감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