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 13

푸른 섬 2011. 1. 26. 19:45

구하라

스가랴10장1-12

우상이라는 것이 왜 매력적일까요?

우리 아이도 우상은 싫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왜 우상에 매력을 느낄까요?

우상이 싫다고 해서 우상이 나와 멀어질까요?

우상은 늘상 사람과 동행합니다.

사람과 동행한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시죠?

우리 주위에 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한번 말해 보세요.

우상이 당신과 동행합니다.

당신의 그림자와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펄쩍 뛰며 여러분들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해야지 어떻게 우상과 동행할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얼마나 좋습니까?

듣기에도 좋고 마음에 다짐도 되고.

그런데 당신은 우상과 동행합니다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립다는 것은 자신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구와 동행합니까?

홀로 살아갈까요?

아닙니다.

우상과 함께 살아갑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항상 우상과 함께 살아가는 자입니다.

로마서1장18-2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난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든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들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주, 조물주를 인정하고 믿습니다.

의지하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로 우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치환이라고 합니까?

바꿔치기 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탐심을 갖고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방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개입됨으로 유대인들은 오히려 더욱더 죄인으로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3장1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라는 것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해 준 것이랍니다.

본래 율법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말입이다.

율법이 개입됨으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가두어 졌다는 것을 밝히드러낸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푹 빠져 있음이 율법이 개입됨으로 더욱더 분명하게 들통난 것입니다.

창세기1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나옵니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롯, 롯의 처, 두 딸, 두 사위

두 천사의 방문으로 소돔땅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롯에게 귀뜸을 해 줍니다.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롯이 먼저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말했습니다.

왜 먼전 사위들에게 말했을까요?

이들이 제일 문제였겠지요.

자신들이 사는 곳이 멸망당한다고 하니 사위들이 뭐라고 합니까?

농담하시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먹고 잘 살고 즐기며 사는데 멸망, 장인어른 농담도 잘하십니다.

장인어른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닙니까?

제가 성경에 없는 말을 좀 덧붙여서 말씀드렸습니다.

사위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사위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말해 보았자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동틀때까지 사위들을 설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동이 트 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바빠졌습니다.

롯을 빼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롯과 롯의 아내, 두 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성밖에 두었습니다.

롯이 지체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애타겠습니까?

옆집 친구등등.

우리가 애닯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꼭 함께 살고 싶다는 사람들.

그들이 지옥가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자 천사들이 손을 잡고 이끌어 내어버렸습니다.

성 밖에 도착한 후 이제는 알아서 가라고 합니다.

도망가라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합니다.

들에 머물지도 말라고 합니다.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롯이 간청해서 소알이라고 성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4-26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짐 받은 사람은 롯과 그의 두딸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위들은 왜 건짐을 못받았습니까?

농담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출장가야 하고, 자식 키우기 바쁘고 한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불로써 심판하십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웃끼고 있네 아닙니다.

세상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쭉 이어져 오고 있는데 무슨 멸망.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의 소리가 다 헛소리였지 않느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좋아 농담으로 여겼더라지 장인어른을 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사위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그들만의 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삶이지요.

그들의 생활.

소돔땅에서의 삶.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 귀엔 멸망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현재의 삶을 믿고 있습니다.

현재 생활이야 말로 자신들을 살리는 삶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함께 롯의 처가 나옵니다.

롯의 처가 왜 뒤를 돌아 보았을까요?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깝다 아닙니까?

그립다 아닙니까?

아깝고 그립고.

이게 우상숭배지요.

자신이 이룬 것들,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들, 자신의 흔적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람관계들, 자신이 모아 놓은 재산, 자신이 수고하여 지은 집, 엄청난 돈을 들여 장식한 집.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설입니다.

설날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이지요.

저도 모일 것입니다.

우리가족이 일년에 유일하게 한번 복음을 듣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족을 버려라면 버리겠습니까?

만일 부모님이 재산이 수십억, 수백억인데 버리라면 버리겠습니까?

돈이 없어도 부모, 형제 버릴 수 없죠.

자식 버리겠습니까?

여러분이 소유한 집을 버리겠습니까?

직장을 버리겠습니까?

롯의 처가 특별히 나빠서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닙니다.

롯의 사위가 특별히 악해서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이 아닙니다.

롯의 처나 롯의 사위는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어찌 롯의 처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전히 우린 주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살지 않습니까?

불로써 심판하시기 위해 간수한바 되었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 옵니까?

이 땅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무슨 유행가 가사 처럼말입니다.

아니 뒤 돌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애 뒤로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까?

롯의 사위와 롯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롯의 아내와 롯의 사위들의 삶은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이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충격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냥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일상에 매여 살아 간다면, 땅의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냥 불심판입니다. 지옥입니다.

롯의 사위나 롯의 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은 장차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긍휼이 없는 자가 어떻게 되는가를 머리 보여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드라빔과 복술자가 등장합니다.

드라빔은 점을 칠때 사용하면 집안 수호신상입니다.

복술자란 점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자들의 말을 듣습니다.

왜 이런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동행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와 코드가 맞거든요.

이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단 훨씬 나의 몸에 안성맞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났어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돈이란 것에, 가족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뭘까요?

이유 없습니다.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탐심을 가라고 해서 갑니까?

없어져라고 해서 없어집니까?

눈은 보기만 하면 탐욕이 생기지 않습니까?

차를 살 때 좋은 것을 보면 그 아래는 눈에 들어오지 않죠.

인테리어 할 때 좋은 재료를 보면 그 아랫것은 아애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입은 어때요. 입맛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다 먹지요.

먹어도 족함이 없습니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옷 한번 보세요.

비싼 온 한번 입어 보세요.

시시한것 입고 싶겠습니까?

우리 아이가 얼마전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엄마 다른 친구들은 매일 부추를 바꿔 신고 와.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꽤가 있다 보니 말을 돌려 가면서 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우상숭배속에 둘러 싸여 있을 뿐 아니라 함께 뒹굴며 살아갑니다.

이런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우린 롯의 구원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습니다.

우린 탐욕 붙들고 있는데 주님이 손을 잡고 끌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탐욕이 있어요.

우상과 동행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기에 따라 붙었습니다.

3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신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 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싸울때에 용사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엄청난 번영을 가져다 주신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상숭배자였는데 드라빔과 복술자에게 묻혀 살아던 자들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해 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들의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히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이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성도의 삶이 이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화려한 삶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4장11-13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주님이 이렇게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우상과 동행하는데 어떻게 이런 삶이 살아진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주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믿는 자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노력해서 안됩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자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탐욕덩어리인 인간은 말씀조차도 탐욕을 채우려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차단해 버리시고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 이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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