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 12

푸른 섬 2011. 1. 26. 19:44

스가랴9장1-17

최근 한국에서 군사적 문제가 일어 났었습니다.

군인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이런 상황에서 여러 나라들이 군사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마 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군사력이 강한 자신의 나라를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괜히 의시 댑니다.

한국은 10월 1일이 국군의 날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날은 공휴일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고 갖 컬러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될 때쯤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국군의 날이 되면 군사행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설명을 기억해 보면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자랑하는 것이었지요.

모든 국민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한국군에는 군목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군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입니다.

아마 이곳에 복무하는 목사들은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국가가 동의하는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동의하지 않는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회사에는 사목이라는 것이 있어 이 목사는 오직 회사를 위해 설교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여기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 이익 되지 못하는 설교를 한다면 어느 사장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날마다 회사가 망해야 한다고 설교를 한다면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겠지만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거대한 군사력을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허황되게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군사력의 문제를 계속 거론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조직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경제조직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그 곳에 내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틀이 어긋나면 돈은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말도 안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시온의 왕이 등장합니다.

이 왕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왕입니다.

그런데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분이 타고 오는 것이 어린 나귀입니다.

9절에서는 겸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왕이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겸손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온의 왕.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 나귀새끼를 타신다.

어떤 느낌입니까?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말이 좋아 겸손이지요. 누가 겸손한 것을 인정해 줍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없어 보입니까?

겨우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펴며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 줍니다.

왕의 행차가 너무 초라합니다.

사람들의 외침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사람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라 외칩니다.

물론 이들의 마음속엔 딴 마음이 있지요.

어찌 되었든 인간들의 탐욕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기엔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지?

예수라는 인간이 뭐야.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지.

왕의 행차를 본 경험도 없느냐?

가진 자들이 보기엔 예수님의 모습은 별 볼일 없습니다.

이런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신답니다.

어린 나귀를 탄 왕이 승리한답니다.

9장1절을 보면 거창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마치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4절을 봅시다.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 울지라”

참으로 신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경고가 경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어버리신답니다.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얼마나 신납니까?

군사력이 강한 블레셋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이 얼마나 신납니까?

8절을 보면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신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누가 합니까?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시고 오시는 왕이 하신답니다.

어떻게 합니까?

언약의 피를 통해 하신답니다.

11,12절입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요새)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듣는 이스라엘 기분 좋습니다.

특히 10절을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에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그런데 이 평화의 세상이 오기 전에 유다와 에브라임이 강력한 힘을 소유하여 적들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난후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그 바탕은 어린나귀를 타신 왕이 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이런 상황이 온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듣기만 해도 기분 좋지요?

지금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별 감이 없지요.

이 말씀이 도대체 오늘을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루하루 돈 벌어 자식 키우기 바쁜데 이 말씀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말씀이 신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동화책을 들으면 그 이야기가 사실처럼 듣는 것과 같이 듣습니다.

정말 배트맨이 있고 스파이더맨이 있는 줄로 믿지요.

예수님을 믿을 때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 동화가 정말 동화인줄 압니다.

스파이더맨은 없다는 것을 알지요.

산타 할아버지가 어릴 때 실제로 있는 줄 알지만 좀 크면 다 부모님이 선물을 주시는 줄 압니다.

그래서 철이 좀 들면 성경 말씀은 그냥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듣습니다.

가끔 나에게 필요한 말씀이 있으면 쏙 받아먹지요.

동물원 곰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 계속해서 구약 소선지서를 하는데 참으로 우리와 거리가 먼 말씀 아닙니까?

사람들은 목사에게 요구합니다.

제발 내가 알아듣는 말 쫌 해라.

제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긍할 말쫌 해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장단을 맞추어 줍니다.

언약의 피로 이 모든 일들을 해 내시겠답니다.

어린 나귀, 왕 언약의 피.

결국 사람들에겐 얕잡아 보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습니다.

그런데 이 피로 이 말씀을 다 이루신답니다.

먼저 이룬 말씀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됩니까?

어린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분,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 , 이것을 근거로 하여 스가랴9장 말씀을 이루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분명 스라갸서는 눈에 보이는 일을 두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귀새끼타는 것, 언약의 피.

그렇다면 불로써 심판하시는 것도 실제로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심판을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핍박을 받습니다.

피로 언약을 이루신 분이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로서 강력한 힘을 가져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갑자기 스가랴가 두 종류로 갈려 버립니다.

나귀새끼 타는 것이나 언약의 피는 말씀대로 인데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은 오히려 역전되어 일어납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이 교만한 자 같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오히려 핍박을 받으니 말입니다.

13-15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되어야 뭔가 일이 될 터인데 복음을 전하면 반발만 거세게 일어납니다.

물론 순종하는 자들도 있습니다마는 이들은 매우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13-21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 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 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주 권력층, 힘이 있는 자들이 볼 때엔 이들은 조그만 기분 나쁜 무리들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거창하게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회개 합니다.

많은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냥 감옥을 빠져 나옵니다.

감옥에서도 복음은 전파됩니다.

굉장히 신나는 일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사도행전 끝부분에 가면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갇힌 상태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지요.

복음의 핵심은 배척에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이 복음전파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널리 전파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지옥 보낼 자들을 지옥 보내기 위한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기대하는 그런 복음은 처음부터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처음을 보면 우리가 흥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정도의 일은 일어나야지.

마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비록 문자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아도 적어도 영적으로는 이루어져야지.

그래 사도행전은 틀림없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영적으로 성취된 것이야.

이렇게 다 해석을 합니다.

좀 상식이 있고 공부한 목사들은 다 이렇게 해석을 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전쟁이 피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언약의 피로 승리하셨듯이 성도도 역시 피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꼴이 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피증인으로 쓸쓸하게 끝나는 삶이 참 성도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거대한 군사력을 꿈꿉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꾸자꾸 쌓아야 합니다.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야 말로 좋은 느낌이지요.

그러나 증인은 피로 살고 피로 죽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들이 언약의 피를 가리키고 있음을 믿는 자입니다.

거대한 힘 속에서, 거대한 경제 조직 속에서, 거대한 세계 속에서 언약의 피는 그야 말로 무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의 피는 멸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피, 예수님의 피가 어디에서도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까?

여기 앉아 있는 우리로부터 멸시당하고 무시당합니다.

성도는 무엇으로 삽니까?

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너무너무 감사한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피만 자랑하고 예수님의 피를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들의 자랑은 십자가의 피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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