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 10

푸른 섬 2011. 1. 2. 20:29

포로생활과 금식

스가랴7장1-14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충동으로 인해

 어떤 한 사람을 처참하게 파괴시켰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과거에 살아 왔던

 방식을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신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 생애의 과업이라

여기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읽어 보지는 않아도

 제목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부활.

 

김태원의 부활이 아닙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하면 김태원의 부활을 먼저 떠 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을 두고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모양입니다.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지요.

 

사회 모든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네흘류도프 를

내세운 것이지요.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한해가 가는

 마지막 날이 되면 송구영신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왜 송구영신예배를 드릴까요?

 

말씀대로 살아 세상을 바꾸려고 그럴까요?

아마 이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랑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씀대로

 살아 복 받자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한해를 맞이하려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올 한해도 십자가만

 전하다가 죽읍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주님만 전파되면 감사합시다라고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누가 송구영신예배 드리러 오겠습니까?

 

어린아이를 깨워 누가 그 예배에 참석하겠습니까?

성경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됩니다.

 

어차피 말씀을 해석하는 주체는 사람이니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말씀에서 찾아내어 제공하면 그뿐이지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중요하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겸손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2절을 보세요.

 

“때에 벧엘 사람이 사례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얼마나 올바른 태도입니까?

 

적어도 하나님께 나아 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본인이 직접 와서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본인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합니다.

3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그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게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5,6절입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이 말씀에 근거하면 벧엘사람이 직접

오지 않는 이유를 알만합니다.

 

벧엘 사람은 분명 칠십년 동안 열심히

오월과 칠월에 금식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은 자기를 위한 금식이었을 뿐입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가는 상태가 되었기에

금식을 계속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를 묻는 것이지요.

형식은 완벽하게 갖춥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묻는 태도 말입니다.

신앙생활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포로로 잡혀갔어 금식은 꼬박꼬박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금식하라면 얼마든지

 금식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서 이들이 얼마나 당당한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았다는 것이지요.

 

포로에서 돌아온 것은 아마 그들의 금식이

 약간의 효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당장하고 자랑스럽게 겸손하게

 묻는 저들에게 여호와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한 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 아니랍니다.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분명 저들은 여호와를 위해 금식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을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금식이

너희를 위한 금식이요 너희를 위한 먹고

 마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열심인 사람이 많습니다.

전도에 열심인 사람, 헌금에 열심인 사람,

설교에 열심인 사람, 봉사에 열심인 사람,

 가난 한 자들을 도와주는데 열심인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님께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한 열심히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한 열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당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아주 겸손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지요.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벧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저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너희들이 전도하고 , 봉사하고, 설교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다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보나 마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얕잡아 봅니다.

 

제가 설교할 때 마다 말씀드립니다마는

 성경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해서 그렇게 쉽게

해석되어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전 성경을 보면서 희한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아서,

즉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아서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금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먹어도 마셔도 다 주님을 위해

 해야 하지 않을까요?

8-14절을 보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9절부터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여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하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해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불순종 하여 심판 받아 이스라엘 땅이

 황무케 되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포로에 잡혀 가서도 여전히

그들은 여호와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여호와를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마는 실제로는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벧엘 사람들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마태복음21장33-46절을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한 집주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농부들이 종을 받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이 아들은 공경하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농부들이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고 하여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저희들이 대답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두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어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44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린 잘 모르겠죠?

물론 아시겠죠?

 

놀랍게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완벽하게 이해해 버렸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 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말씀을 이해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기분 나쁩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그냥 막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이것이 이해됩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우리 마음이 그렇게

찔리게 말씀이 다가 온다면 주여 맞습니다.

옳습니다.

 

제가 그런 나쁜 죄인입니다.

아들까지 죽이려는 놈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누구의 마음입니까?

 

톨스토이가 쓴 부활의 주인공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쉽게 생각되어집니까?

그런데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바보입

니까?

바보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있어서는 천재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지키자는 자들입니다.

네흘류도프보다 더 말씀대로 살자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이 싫을까요?

 

왜 예수님이 죽이고 싶을까요?

왜 말씀을 들어도 회개할 마음이 없을까요?

 

왜 바벨론 포로에 잡혀 가서도 제대로

 된 금식이 안 나올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 얻어터져도 그 모양 그 꼴일까요?

 

왜 말씀으로 얻어터지면 더욱더 힘을

내어 말씀에 대적하려고 할까요?

 

우린 가끔 사람들의 간증이라는 것을 듣습니다.

물론 열심 있는 사람이 듣겠지만

 돈 벌기 바쁘고 살기 바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을 기회도 없겠지요.

 

어찌되었던 우리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나

 아는 지인들로부터 그런 간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간증의 한결같은 패턴이 있죠.

 

내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내가

 내 죄를 회개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좋은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얻어터지니 인간되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얻어터지니 인간되더라. 예수님 믿는 사람 되더라.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얻어터져 인간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어떻습니까?

 

얻어 터져도 늘 제자리입니다.

그때뿐이지요.

 

그 순간 회개했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제자리.

그런데 뭐라고요.

 

얻어터져서 인간되었다고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린 얻어터져도 될 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받은 자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주신 자들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요.

그러니 사람의 경험은 무용지물입니다.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경험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경험보다 귀한 자산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한번 해 보았지만 또 다 새로 하는것 같습니다.

 

그때는 업자에게 다 맡겨버렸고 지금은

 하나씩 찾아서 하니 너무 다릅니다.

설계도부터 디자인까지.

 

그런데 일꾼들은 그냥 해 냅니다. 경험이 있거든요.

 

목수는 제가 무얼 요구하는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오히려 자신이 더 좋은 의견을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험이라는 것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귀하게 여기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경험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똥이라고 합니다.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배설물을 좋아라고 붙잡는 인간 봤습니까?

똥개야 똥을 먹지만.

 

빌립보서3장7-9절을 봅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인간의 경험은 배설물입니다. 똥입니다.

오늘 스가랴 7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이라는 경험조차도

너희들에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오히려 그런 심판경험 속에서도 너희들의 죄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남을 말씀하십니다.

 

얻어터지는 가운데 죄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남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고 보물로 여기는 자들은 진짜 저주받은 자입니다.

 

얻어터지면서 죄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 십자가가

 더욱더 뚜렷이 보이는 복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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