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 강해 5

푸른 섬 2010. 11. 21. 16:38

죄과를 제하여 버리다.

스가랴3장1-10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네요.

 

그 영화 내용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 여인의 아들이 납치를 당해 죽습니다.

 

엄청난 괴로움 속에서 교회를 찾은 주인공은 드디어

납치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아들납치 살해범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주인공 여인은 돌아 버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좀 끔찍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납치되어 살해 되었다. 죽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죽인 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었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자신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고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있는데 제가 너무 과격한 표현을 사용합니까?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못 오겠다고 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버렸답니다.

 

우리 중에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런 자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자에 대한 분노라기 보단 그런 자를 용서한

신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그 악한 자만 용서해 주느냐 말입니다.

 

나의 딸을 , 나의 아들을 납치하고 살해한 자를

어떻게 용서해 주느냐 말입니다.

 

얼마 전에 파괴된 사나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 사람이 중형교회의 목사입니다.

 

월급도 꾀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딸이 납치 되었습니다.

 

돈을 주면 딸을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범인이 숨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목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계속해서 아이를 찾고 말입니다.

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믿고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다라는 대사 말입니다.

아내는 결국 아이를 찾다가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다시 범인이 찾아옵니다. 돈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돌려 주겠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 아내의 산소호흡기를 떼고 보험금을

타 그것으로 아이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럴 때 범인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요?

우리는 이러고 싶습니다.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내 목숨,

내 재산을 건드리는 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입니다. 결코 이런 자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개입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이런 자들을 용서하신다 말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성경에도 나옵니다.

다윗이라는 왕 압니까?

 

이 사람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자신의

잘 못을 감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계획된 살해를 감행합니다.

 

물론 적들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우리아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용서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특히 시편 51편을 보면 우리를 더욱더

화나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4절에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우리아의 입장, 우리아 편에서 이런 다윗의

고백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밀양영화에 대해 글을 썼는데

그 살해자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죄인들의 생각이죠.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복음23장42절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강도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할까요?

꼴값하고 있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 하

시니라”

참 이상한 예수님 아닙니까?

 

좀 우리의 상식, 우리가 수긍할 만하게 일을

하셔야 하는데 사람을 울화통 터지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을 할까요?

 

예수님의 처분을 왜 못 마땅하게 여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납치 살해한 인간보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강도와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나는 다윗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나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납치 살해범들이나, 강도와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납치

살해범이 받는다면 그 당사자는 어떨까요?

그 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한 강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자신이 예수님을 납치 살해, 아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몰라요.

 

자신이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지를 몰라요.

생명의 주되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보통일이고

 사람을 납치 살해하는 것은 아주 엄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오늘을 사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속이 시원합니다.

 

이렇게 해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7장37-39절에 보면 한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죄인입니다. 나쁜 여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자입니다.

 

이런 여자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들이 보았습니다.

 

이들이 뭐라고 할까요?

여자를 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욕하지요. 물론 여자를 욕하겠지요.

 하지만 여자를 욕하는 것은 입만 아픈 것이고.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죄인이 여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과 함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예를 하나 드십니다.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답니다.

값을 것이 없어 둘 다 탕감해 주었을 때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

 

당연히 많이 탕감을 받은 자 아닙니까?

지금 이 죄인인 여자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너무 너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지옥가야 할 인생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이 아닌데 예수님의 죄용서

하심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습니다. 자신들은 의로운데

 무슨 죄용서함이 필요합니까?

 

이 땅 사람들은 예수님의 죄용서하심을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나름대로 착하게 살고 있는데

무슨 예수님의 죄용서함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앞서 말한 그러한 행동을 일이킵니다.

 

즉 나쁜 짓한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죠.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왜 할까요?

 

그만큼 사람이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자신은 죄용서함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는 타인이 죄용서함을 받으면 열받습니다.

타인이 죄용서함을 받을 때 열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은 죄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사단이 지금 누구를 대적합니까?

여호수아를 대적합니다.

어떻게 대적합니까?

정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불에 그슬린 나무입니다.

새까맣다는 것입니다.

 

더럽다는 것이지요. 완전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것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에 그슬린 나무 보셨습니까?

 

제가 어릴 때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불놀이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니 불에 그슬린 나무가 어떤지

금방 압니다마는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죠.

 

가끔 텔레비전 뉴스 같은 것을 보면 불난 곳을 비춰주잖아요.

새까만 것을 보실 수 있죠.

 

이렇게 더러운 죄인이 여호수아 랍니다.

그러니 사단이 대적할 만하죠.

 

그런데 사단이 지꼬라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버립니다.

 

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그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죄 덩어리인데 어떻게 그 죄를 제하여 버립니까?

이게 납득이 됩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납치 살해범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이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변국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야 네가 천국갈것 같으며 나는 더한 천국도 간다라고 하죠.

이런 이야기 못 들어 봤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갑니다 라고 하면 나는 안 믿어도 천국간다라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가 차이가 별로 없잖아요.

 

물론 그래서 성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개수작을

부립니다마는 이들 또한 고승들 앞에 가면 깨갱거릴 것입니다.

삶으로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찌 되었던 사람들은 자신 만만합니다.

 

자신이 얼마든지 천국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식으로 갈수 없습니다.

특별히 여호수아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대 제사장입니다.

이런 자가 죄 덩어리입니다.

이런 자가 무슨 대제사장직을 수행합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죄를 다 제거해 버립니

다.

오히려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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