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24102010 스가랴 강해 1

푸른 섬 2010. 10. 24. 21:08

본받지 말라

스가랴 1장1-6

출애굽기20장을 보면 그 유명한 십계명이 나옵니다.

2절부터 한번 살펴 봅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말씀을 전제로 하시고 십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들은 그냥 자유인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종이었다는 말씀이죠.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신 여호와께서

법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종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십니다.

 

첫 번째 계명을 보면 3절입니다.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바로왕 말만 들어야 한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는 나만 섬겨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정문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씀을 과연 지킬 수 있습니까?

모든 우상이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골로새서 3장5절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우상이라는 것은 탐심으로부터

 나와 만들어진 것이지요.

 

힌두교라는 종교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최고의 신인 브라만이 자신을

 분해시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돌, 식물, 인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마야라고 합니다. 마야가

무슨 뜻인고 하면 환영입니다. 신성의

불완전한 표현이요 개별적 반영이라고 합니다

.

그래서 행복과 충만함은 광물이나 동, 식물로서

이승의 삶을 여러 번 거친 뒤 영혼이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순간에만 얻어질 수 있답니다.

 이것을 해탈(모크사)라고 합니다.

 영혼이

 세상의 고된 삶에서 벗어나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죽음의 순간에

그 영혼은 방금 끝맺은 삶에서 어떻게 처신 했느냐

(즉 카르마, 행위) 에 따라 살아 있는 또 다른 존재의

 몸으로 옮겨갑니다. 삼사라 즉 윤회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했느냐 나쁜 일을 했느냐에 따라 윤회는

 

 보다 나은 삶의 형태로, 예를 들면 동물은

더 나은 동물로, 인간은 어떤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난답니다.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마지막 해탈의

순간에 멀어지거나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종교란 대체로 그 시대의 체제를

 굳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입니다.

 

행복과 충만함을 갖고자 하는 자체가 우상숭배가 됩니다.

 

단지 종교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주어지면 그 말씀을 갖고

 왕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덤빕니다.

 

아니만 천국(행복과 충만함이 있는)에 들어가

보겠다고 탐욕을 들이밉니다.

 

이 탐욕으로 인해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방종교입니다.

 

4절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는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기키는 자에게는

천대까기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우상을 섬길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출애굽기32장을 보면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 왔습니다.

그러자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해 만들라고 합니다.

 

모세가 눈에서 보이지 않자 눈에 보이는 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인 여호와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송아지 모양입니다.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금으로 만든 송아지로 둔갑시겼습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배당이라도 있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 않습니까?

 

뭔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되어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도록 여호와를 만들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죠.

송아지가 우상입니다. 그런데 그 금송아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만 할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15장 8절을 보면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상15장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의 시각은 언제나 외모, 즉 밖으로 드러난 것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옛 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 사람의 중심을 아십니다.

 

무슨 짓을 벌일지 다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길 것도 알고 계시고,

형상을 만들것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 번째 계명을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죄 없다 하지 아니리라”7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도 지 마음대로 부릅니다.

 필요에 따라.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들 장난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오늘날 어떻게 불립니까?

 

자신의 탐욕을 따라 부릅니다. 이용합니다.

 

십자가조차도 인간들의 노리개로 만들어

버리니 말입니다. 장식품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잖아요.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서 합니다.

 

이게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요.

아담이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인간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말씀으로 사용했습니다.

 

스가랴를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바벨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여호와의 진노가 왜 있습니까?

 

말씀대로 진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자체를 우습게 여긴 결과가 여호와의 진노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포로에서 돌아 와도 진노의 경험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만일 그 당시에 스가랴 선지자를 만나고

학개 선지자를 만났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말씀대로 다시

돌아 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모

양 이 꼴이라면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4절에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열조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열조들의, 조상들의 불순종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너희 열조가 같다는 말입니까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들이기엔, 우리가 보기엔, 우리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습니까?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달라진 상황,

변화된 상황이 아닙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출애굽 한때 열 가지 재앙도 경험하고

홍해도 건넜고, 쓴물을 단물로, 반석에서

물을 ,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이들은 번번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했습니다.

 

5-6절을 봅시다.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 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심판해 버리니

그제서야 우리행위대로, 우리 길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라고 하신 뜻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선지자들이 외칠 때 들었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 비로소 여호와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줄 아는고 하면 심판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전에는 죽어도 모릅니다.

 

물론 심판 받은 후에도 깨닫는 자만 깨닫지요.

그렇다면 왜 심판을 통과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줄을 알까요?

 

이게 아담 안에 있는 인간입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이 외쳐도 그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입니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경험을 너희들이 듣고 보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됩니까?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못합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전했습니다.

그러데 자신의 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병이 찾아 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행복을 외치던 사람, 자신의

 몸에 찾아온 병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자살입니다.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자살함으로 자신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옥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몸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인간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뭐라고 합니다.

로마서 7장21-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사도바울조차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두고 두 세력이 싸우고 있죠.

마치 자기는 방관자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바울이 뭐라고 외칩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신의 어떤 자로 남아 있습니까?

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몸을 마음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죄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마음의 갈등을 가지면서

그는 곧장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앞장세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도 다 헛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 속에 이미 그런 것들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셨잖아요.

나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믿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

 처음 믿었을 때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러한 경험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주님 되신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어떤 간증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개과천선하여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나쁜 짓,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쁜 짓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있습니다.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가 죄악임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임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힌두교와 같은 것 아닙니다.

여러분 우린 안 됩니다.

 

돌아오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불순종과 그 결과를 보더라도 안 됩니다.

지금도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 주실 때에만 우리는 믿음 안에 거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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