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강해 4

푸른 섬 2010. 11. 14. 17:43

노략물된 성도

스가랴 2장1-13

어제 동물원을 갔다 왔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제 눈에 띄는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원숭이들인데.

 

원숭이 집을 언덕에 많이 지어 놓고 사람들이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감옥이 있었습니다.

 

원숭이 감옥입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들고 지나갈 때 몰래 뺏어

 먹는 원숭이들은 그 우리에 갇히게 돕니다.

그리고 얼마 기간이 지나면 풀려나겠지요.

 

그런데 만일 그 감옥이라는 것이 없으면 어떨까요?

만일 감옥이 없으면 그곳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나쁜 원숭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들을 방목하는 곳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원숭이 감옥입니다.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면 금새 알아 차립니다.

 아하 조심해야 되겠구나.

감옥이 있느냐 없으냐에 따라 그 곳의 상황이 파악됩니다.

이것은 그냥 땅의 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부터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배치시켜 놓으셨습니다.

 

선악과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됩니다.

선악과를 통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판단함에 있어서 다른 것과 비교하여 판단합니다.

 

이런 본성이 있다는 자체가 죄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어떤 비교대상을 두고 판단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지옥가야 마땅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항상 둘을 비교합니다. 셋을 비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셋이 되었던 넷이 되었던 궁극적으로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도 둘을 갖고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닙니다.

 

항상 둘을 갖고 일을 하십니다.

마치 인간세계와 비슷하죠. 아니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이런 구조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구조를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구조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틀 속에 집어 넣어버리셨습니다.

마치 나쁜 짓한 원숭이와 그렇지 않은 원숭이로 나누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과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역시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척량 줄로 측량하여 성곽 없는

촌락같이 다시 건설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반면 바벨론은 이들의 노략거리가 된다고 하십니다.

한쪽은 흥하고 다른 한쪽은 망하는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꼭 이렇게 한쪽은 망하게

 하시고 다른 한쪽은 흥하게 하셔야 속이 시원한 분이십니다.

죄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싫습니다. 물론 타인이

 망하면 기분 좋아하죠.

그런데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에게도 망하게 하시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나오니

 인정은 하지만 자기 자신을 망하게 하나님을 결단코 있을 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는 축복축복,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꾸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는데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성도라면 이미 좋은것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것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은 아마 이 땅에서 뭔가 잘 풀리는 인생,

돈 많이 버는 인생, 건강한 인생을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죠.

그러나 그것 아니면 뭐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피 공로로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것 다른 것 무엇이 있습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니 늘 상 땅의 것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동물원에 가니 곰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곰에게 음식을 주면서 곰을 재롱떨게 합니다.

과자를 손에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 곰이 돌아요,

 그리고 난후 과자를 주면 좋아라 받아 먹습니다.

 

곰의 습성이 그런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먹을 것, 바라는 것이 먹을 것 밖에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짓은 다하는 것입니다.

동물원에 가득한 짐승들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 짐승 같은 죄인들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만 관심을 두는 동물들.

돌고래, 바다사자 모두가 다 먹이에 미쳐 있었습니다.

먹이면 주면 기분이 좋아라 물속을 왔다 갔다

. 뛰어 올랐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성적을 잘 받아오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자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온 집안이 초상분위기입니다.

 

사업이 좀 잘되면 얼굴에 웃음꽃 활짝 피고,

잘 안되면 근심으로 가득 차 있죠.

짐승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사람들이 짐승남이라고 하나요.

짐승남이 있으면 짐승녀도 있어야 하는데..

 

예루살렘이 새롭게 거대하게 건축되는데 왜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노략거리로 전락해야 합니까?

이 상관관계를 푸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냥 예루살렘을 새롭게 건축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하필 바벨론을 노략해서 건축합니까?

 

주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반드시 노략을 해서 건축하는 형식을 갖습니다.

제가 좀 이상한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까?

 

우린 보통 생각할 때 주님께서 설마 노략해서 주님의 일을 하실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노략이라는 말과 여호와 하나님과 잘 안 맞잖아요.

잘 어울립니까?

 

안 어울립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는 노략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건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봅시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애굽에서 뺏어 내잖아요.

그것도 폭력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폭력이라고 하면 또 여호와 하나님과 잘 안 어울립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모세를 불러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 애굽에 보냅니다.

바로 왕이 볼 때 어떻습니까?

모세가 미친 사람으로 보일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관대 그런 말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과 불, 메뚜기, 흑암, 장자 죽임.

열 가지 재앙이 폭력적이 아닙니까?

 

아니 이런 폭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장자를 죽여서 뺏어 낸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러한 폭력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 중심에 놓입니다 마는 .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만 살아 남았고 나머지는 다 죽였습니다.

죽이시고 살려내고 죽이시는 그러한 폭력적 하나님.

우린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과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다릅니까?

바로 왕 입장에서는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은 노략꾼입니다.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놀고 있는데

끼어들어 폭력을 행사하고 훼방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 분해서 참을 수 가 없죠.

 

자신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덤비다가 다시 얻어 터집니다.

이스라엘은 노략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노략물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 버립니다.

이제 다시 스가랴 2장으로 가봅시다.

 

왜 예루살렘의 재건이 노략물로 형성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자체를 두고 보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예수님 쪽을 먼저 보고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세례요한의 증거를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4장 10-12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심판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곡입니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알곡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마태복음26장26-28절을 봅시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알곡들이 발생합니다.

자발적인 알곡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노략과 무슨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노략은 언제 발생합니까?

반드시 전쟁에서 발생합니다.

전쟁이 없으면 노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알곡은 전쟁의 결과물입니다.

에베소서4장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 사로잡혀 있었습니까?

성도들입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으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전쟁입니다.

 

전쟁이 없이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의 결과물로 노략물을 챙기신 것입니다.

사도행전2장32-36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쟁개념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등상 되게 한다는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2장10절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복종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이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도란 전쟁의 결과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그 노략물들이 바로 성도라는 말입니다.

노락물이라고 하면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릅니다마는 사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노략물입니다.

본래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를 전리품으로 가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의 노략물과

예루살렘의 재건은 절대로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본래 어떤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벨론 같은 나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눈동자를 범하는 자와 같은 자였습니다.

이게 구원받은 성도의 자리였습니다.

 

이런 자를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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