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강해 1

푸른 섬 2010. 9. 20. 11:02

황무한 성전과 판벽한 집

학개1장1-11

예배당 건축하는 목사들이 오늘 우리들이 보는 본문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을 갖고 갖은 협박을 합니다.

 

4절을 이용하여 이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판벽한 집이란 벽과 지붕에 각종 장식을 한 화려하고

 안락한 저택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2절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협박하죠.

 

결론은 돈 내라는 말입니다.

 

단지 모임을 위해 모이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사기 치면서 재산적 가치를 높게 하기 위해 판벽한 예배당을 짓습니다.

누구 좋아라고 그럽니까?

 

겉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저거 좋아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본문 말씀을 보게 되면 그냥 입을 다물죠.

 

주님의 몸이 성전이요 그 지체인 성도가 성전이라

 아무리 말씀을 알려 주어도 듣지를 않습니다.

 

말은 맞는데 그래도 예배당이 성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이 당깁니다. 몸이 그렇게 인정하고 싶어 합니다.

추상적인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잡을 수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짓은 구약 이스라엘이 신물 나도록 한 짓거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닌다는 인간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붙들고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도 인간들은 피 흘리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목사들이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배당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당 건축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성전건축이라 해야 합니까?

 

젊은 목사들, 개혁적인 목사들조차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성전건축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상가를 빌리더라도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사람들이 돈을 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죠?

그런데 이게 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먹혀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몸이 성전임을, 성도의 몸이 성전임을 모를까요?

다 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합니까?

 

돈입니다.

돈이 되게 하려면 사기를 쳐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조롱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주님을 위한 것인데 용어하나 사용한다고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수긍이 안 됩니까?

어찌되었든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인데.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무슨 문제냐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과거에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존재했잖아요.

이런 것이 저들이 주장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건물이 있게 되면 참 성전이 부정됩니다.

성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도 하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주님의 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전운운하면 주님의 몸은 완전 웃음거리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성전건물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자만

정신 나간 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들에겐 십자가의 영이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없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에 미쳐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얼마나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육이라는 말입니다.

육은 지옥 가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지금 유다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을 모를까요?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을 모를까요?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아25장11절을 보면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29장10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렇다면 지금 학개 선지자가 외치는 시대상황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만에 말씀대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산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삽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들입니까?

 

이들은 자기 자신들에게만 관심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판벽한 집과 황무한 성전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유대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까?

예레미아 25장1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시어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행에서 돌이키라고 하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한마디로 하면

오직 저들은 자기에게만 관심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그렇게 혼나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성전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사는 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은 판벽한 집 즉, 아주 화려하고 안락한

 집에 거하면서 성전은 황무한 채로 버려둡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유다의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입니다.

유다의 총독이라 하니 좀 실망스럽지요.

 

70년 만에 돌아 왔으면 뭔가 제대로 돌아와야

하는데 어중간하게 돌아 왔죠.

그러니 다니엘에서는 70년이 70이레로 바뀌어 버립니다.

 

돌아옴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돌아옴이 아니라

이것은 단지 역사적으로 맛보기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정말 돌아옴은 죄에서 구원함을 얻는 일, 즉 예수님의

피능력으로 구원되는 일이 제대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70년 만에 말씀대로 돌아오기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얻어터지고, 혼나도, 죽어도 안 되는 것이 인간들, 즉 죄인들입니다.

뭔가 고칠 수 있을 것 같죠.

 

그래서 좀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개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개혁, 웃기지 마세요.

 

이미 구약에서 개혁이라는 ㄱ 도 꺼낼 수 없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이란 개혁자체가 안 됩니다.

 

말씀을 모르니 인간의 방식으로 개혁하려고 합니다.

물론 개혁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끄집어 와서 말합니다 마는.

자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언급을 하십니다.

5,6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농사가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이지요.

수입이 적다 말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마셔도 흡족하지 못한 상황.

 입어도 따뜻하지 못한 상황. 일군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말입니까?

 

황무한 성전은 버려두고 자기 자신들에게만 관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다.

 

지금 농사도 제대로 안되고 수입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판벽한 집에 거하느냐 말입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그렇게 상황을 열악하게 만들어도

인간들은 기필코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어낸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들이 너희 집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성전에 관심을 둔다면 축복이 쏟아진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저주를 내리시기 때문에

너희들의 소유가 적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매력적이 말씀 아닙니까?

투자로 생각하면 이것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 있습니까?

 

성전에 관심 두고 그곳에 투자하면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목사들이 사기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이 그렇지 않습니까?

 

구약시대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지키면 실제로 땅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말씀을 잘 지키면 분명 땅의 축복을 주셨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까?

그 이유를 우리들이 알아야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분명 자신들에게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들으면 분명

자신들에게 복이 되는데, 유익이 되는데

왜 그렇게 말씀을 안 듣고 바벨로 포로로 잡혀갔을까요?

 

그 이유는 우상이 당긴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안 당긴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에겐 본성상 우상은 당겨도 여호와의

 말씀은 안 당긴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자신을 위해서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간파했습니다.

 

우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있습니다.

러니 우상을 섬기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의

입장에선 제대로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볼 때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상을 섬기겠습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겠지요.

땅의 복을 주시겠다는다, 말씀만 들으면 복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이것을 거부합니다.

말씀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게 죄인들의 본 모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우상 숭배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삼일 만에 부활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에 어떠한 자세를 가집니까?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는 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을 선물로 주시겠다는데,

영생을 선물을 주시겠다는데 왜 거부합니까?

이유는 주님이 무조건 싫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은 없잖아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면 자기 자신은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 얼마나 복음이 싫겠습니까?

그러니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구약 사람들이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단지 열심을 내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아닙니다.

 

순종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여호와의

말씀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피 흘리신 것입니다.

피 능력만이 죄를 사하고 구약에 땅의 것으로

말씀되어진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또 덤빕니다.

 

피 능력 믿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마태복음 19장16-26절을 봅시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무슨 선한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영생을 얻을 자격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부자청년이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이 왜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과 연결해 보세요.

부자입니다.

 

부자는 어떻게 해야 부자 됩니까?

말씀을 지켜야 부자 되죠.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렇다면 부자청년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씀을 다 지켰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난 영생

얻기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라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꼭 누구해석같습니까?

 

오늘날 목사들, 교인들 성경해석과 똑같지요.

말씀 지켜 복 받자. 예수님 믿어 복 받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끌어안고 당당하게 왔는데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니 부자는 허가 찔렸습니다.

말씀은 이렇듯 죄를 만들어 냅니다.

 

학개 말씀에 근거한 부자 청년의 말씀 지키기,

그래서 부자 되기, 그렇게 함으로 부자청년의 죄가 드러납니다.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은 말씀을 지켜서 죄인으로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으로는 천국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최고점에 도달해 있는 부자 청년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가난한 자가되었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바로 십자가의 피능력이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피능력이 그렇게

하심을 믿어지시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이런 분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압니다.

 

그런데 피능력이 임하지 않는 자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시시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시시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확이 많고,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식 잘 되는 것 등등이 하나님의 복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참 성전 되신 예수님께 관심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빠르게 움직입니까

아니면 피 흘리신 예수님을 위해 빨리 움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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