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14:1-11

푸른 섬 2007. 7. 24. 15:43
 

여호와의 날

스가랴14:1-11

앞서 보는 본문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도 우리를 상당히 당황스럽게 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일어날 사실과 동시에 영적인 사실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말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모든 일을 포함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영적이다라고 했을때 이것은 마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영적이라는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령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이루시는 모든 일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이 나중에는 영적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피흘려 세우시는 새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국과의 싸움도 실제로 일어난 전쟁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 싸움은 곧장 사도행전 2장33-36절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실제로 원수들과 전쟁을 치루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 부으주심을 두고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친히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렇지 않는자는 믿지 못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자신의 증인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특징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 그 증인들이 가는 곳 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증인되는 것은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승리하셨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가운데 주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며, 그렇지 않는 자들은 주님을 향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6장11,12절을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린도 전서 15장5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리라”


그러니 만일 전쟁이 혈과 육의 전쟁이라면  이런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전쟁은 실제로 피흘리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실제로 살육하는 전쟁이며,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실제로 죽이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오면 이 전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바뀌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전쟁방식이 아주 독특합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기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삶의 현장이 모두 전쟁터이며, 자신 속에서도 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적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고 하면, 우리들이 사도행전을 잘 알듯이 실제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자리로 몰아 갑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분명 승리한 주님의 백성으로 전쟁에 임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난이라는 것으로 전쟁의 결과물을 받게 됩니다.


구약 때에는 그런데로 좋았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전쟁을 해서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당하기만 합니다.


독특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자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십니다.


신약성경을 여러분들이 유심히 읽어 보시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스가랴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읍이 함락되고 가옥이 약탈되고,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 절반이나 사로잡혀 간다고 합니다. 재물도 약탈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에서 남은 자들이 있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3-5절에서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 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이 구절을 문자대로 그냥 열국을 치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다니엘서를 보게 되면 열국은 곧 사단의 나라, 짐승의 나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뜨인 돌에 의해 산산히 부서질 나라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십자가로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전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그냥 자신의 힘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성도는 에덴동편에 화염검과 그룹으로 막혔던 생명나무가 있는 길로 들어 선 것이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이 땅을  철저하게 둘로 나누어지게 만듭니다.

복음으로 둘로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 피로 씻어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주와 함께 설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을 말씀하신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임하신다는 표현은 이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빛과 광명 한 자들이 떠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참 빛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해와 달은 빛은 자신의 역할을 다 감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사물적인 빛과 어둠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본래 보여 주고자 하던 것을 밝혀 내 주십니다.

바로 어둠이란 죄악 가운데 거하는 것이요, 빛이란 예수님이 빛이시며,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두 빛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해와 달은 모두다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 봅시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1장을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세상은 완전히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빛의 자녀들이 만들어 집니다.


8절에서는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 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림으로 주시는 영생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에스겔47장1-12절을 보게 되면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이 성소에서 흘러, 성전 동문 문지방 밑으로 물이 흘러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물이 흐르는 곳 마다 생물이 번성하고, 바닷물이 소성함을 입게 되고 강이 각처에 이르는 모든 곳이 살겠고, 이와 함께 소성치 못한 곳, 즉 소금땅이 되는 곳도 만들어 집니다.


8절 말씀은 곧장 요한계시록으로 뛰어 넘어가 22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지금 현재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분명 심판 작업, 갈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생수라는 것이 무조건 살려주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살림을 입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죽음, 즉 에스겔47장에서 말씀하듯이 소성치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발생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될 때 이 복음으로 인해 두 부류로 갈라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심판받는 자들과 남는 자들이 발생한다고 슥14장 1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생수는 계절과 상관없습니다.

복음은 환경, 국가, 제도등과 상관없이 전파되어 집니다.


물론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다시 저주가 없는 말씀으로 흘러들어갑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신다고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2장 말씀을 드린대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시편 2편 말씀에 의하면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리며, 질그릇 같이 부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루어졌고, 그 이루셨음을 지금 복음 전파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4장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높아질 것입니다.

이 말씀의 최종적 의미는 예수이름만이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역시 주님의 피로 세우시는 교회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루살렘이 주님의 피공로로 평안하게 설 것입니다.


이 구절을 그냥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다른 본문들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세대주의 해석이 있는데, 그들은 이런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오시는 날을 시간적 이야기로 바꾸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 해석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면 로마서에서 참 이스라엘 되는 주님의 교회개념이 의미 없게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오심은 반드시 도적같이 오신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징조를 자꾸 말합니다.

그러면 징조가 예수님 승천 후에는 없었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습니까?

지금보다 더 핍박을 받았고, 여전히 지진과 화산폭발과 전쟁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현재보다 훨씬 더 전쟁이 심했습니다. 국가가 부족국가로 형성되어 있을때에 전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관심이 주님이 오심을 믿어야 하며, 오신 후에 어떻게 될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재 삶 속에서 주님되신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며 사느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역시 역사적 사실과 묵시적 사건이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삶속에서 예수님의 피공로를 무시하고, 자신을 주로, 왕으로 세우는 자는 생수와 상관없는 자요 주님 되신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항상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복음의 능력은, 주되신 예수님의 능력은 이렇게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능력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 1  (0) 2010.09.20
스가랴14장12-21  (0) 2007.07.24
스가랴9:1-8  (0) 2007.07.24
스가라8:14-23  (0) 2007.07.24
질투하시는 하나님 스가랴8장1-13  (0) 2007.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