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제사장
스가랴6장9-15
면류관은 누가 쓸까요?
당연히 왕이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 중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한 사람 더 등장합니다마는.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헬대, 도비야, 여다야,
스바나의 아들 요시아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오늘 본문에 왜 등장합니까?
금을 내 놓아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자 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들에게서 일방적으로 금을 취하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무슨 강도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강도 두목입니까?
우리 성경 번역이 좀 그렇습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헬대, 토비아, 여다야, 스바니야의 아들
요시야가 포로민이 바친 예물을 가지고
바빌론에서 돌아 왔는데, 너는 오늘 그것을 받으러 가거라”
어떻습니까?
아주 쉽게 이해되죠.
성경을 왜 이렇게 어렵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에서 보면 별 문제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명하여
이들에게 가서 금을 취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 금이 여호와의 것임을 명시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포로 민들이 바쳤는지 바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어찌되었던 포로에서 돌아왔으니
당연히 바벨론에서 가져 왔을 것은 분명하겠지요.
그리고 이들에게서 취하게 되면 결국 이들이
여호와께 드린 금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은 금 예물을 바쳤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역을 바친 것에 중심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취하신다는 것에 중심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눈치 채시겠습니다.
의미는 비슷한데 번역자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보여지는 대목이지요.
우리야 어떻게 번역하든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마는.
어찌 되었든 이들에게서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듭니다.
여기에서의 면류관은 대제사장 여호수아
머리에 씌울 면류관입니다.
사실 대제사장도 관을 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면류관은 왕관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서 취한 금을 가지고
금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웁니다.
총독은 따로 있죠. 물론 왕은 없습니다마는.
그런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왕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왕이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금 면류관을 씌운 후
하시는 말씀을 들어 봅시다.
12절 중간입니다.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갑자기 면류관을 쓴 여호수아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 이야기를 하십니다.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순은 아주 연약한 것 아닙니까?
이런 연약한 분이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고 합니다.
순의 능력으로는 여호와의 전을 결코 건축할 수 없습니다.
봄이 되면 순이 많이 나오지요.
어린아이가 손을 대어도 금세 그 순이
떨어지거나 꺾여 버립니다.
이런 순의 이름을 가짐 사람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고 합니다.
솔로몬 성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 왕, 그리고 다윗왕, 이들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여기에 순이라 이름하는 자.
별명이 순입니다.
그러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겠지요.
별명이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성전을 건축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성전을 건축한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영광도 얻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린답니다.
즉 왕이 된답니다.
뿐만 아닙니다.
왕이면서 제사장도 됩니다.
비로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로부터 금을
취해 금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운
이유가 나옵니다.
금면류관이나 금 면류관을 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장차 오실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을 미리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왕이요 대제사장 되시는 이름은 순입니다.
이 순이라 이름하는 분을 전하는 자로 스가랴
선지자와 금면류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군가 빠졌죠?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 면류관을 헬렘, 도비야, 여다야,
스바나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하십니다.
10절에서는 헬대, 도비야, 여다야,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틀리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경이 엉터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맞지 않거든요.
분명 10절과 14절에 나오는 인물들이
분명 동일 인물인 것 같은데, 그래서
어떤 번역은 동일 인물로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 요시아라는 이름은 너무
달라서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들의 이름이 중요할까요?
이름 중요하다면 아마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이름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이들을 기념하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시면 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대표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벨론에서 갖고 온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갖고 온 금으로 만든 면류관.
그러면 누가 바벨론에서 금을 갖고 왔습니까?
이들 네 사람이죠.
그렇다면 이들 네 사람밖에 금을 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초점을 두고 스가랴를 보게 되면
아무런 문제없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왜 이름이 다를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자체에서 이들이 전하는
분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순이라 이름하는 분.
금 면류관을 쓰신 왕, 대제사장 되시는
순이라 이름하는 분.
이분을 전하기 위해 이들의 이름을
기념하게 됩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금 면류관을 성전에 둠으로 말입니다.
사실 이 금 면류관은 성전 되신
예수님이 쓰시는 면류관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10-11절을 봅시다.
“이 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여기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면류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면류관을 어떻게 받았을까요?
왕관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5장9-10절입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왕노릇하는 제사장이 나옵니다.
왕노릇하니 당연히 왕이 쓰는 면류관을 쓰고 있겠죠.
그런데 이 왕관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로 왕관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은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 왕관을 누구에게 돌려 드립니까?
바로 죽임당한 어린양입니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선물로 주신 면류관을
어린양이 쓰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제가 상당히 많이 나가 버렸지요.
이미 오늘 본문이 거의 다 풀려 버렸습니다.
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 온 자들로부터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듭니까?
그 이유를 요한 계시록에서 밝히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
금을 제공한 자들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면류관의
재료인 금, 면류관 이 모든 것들은 다
죽임당한 어린양을 전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이렇게 보면 성경이 참 쉽죠. 잉
이 부분을 해결해 놓고 이제 왕이시면서도
제사장 되신다는 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을 생각해 봅시다.
왕이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사무엘8장을 한번 봅시다.
5절입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왕이란 다스리는 분입니다.
열왕기 상12장7절을 봅시다.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백성의 종이 되는 왕, 그러나 결국 백성이
영원히 종이 되고 자신은 섬김을 받는 왕이 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열왕기 상12장에서 어렴풋이 보입니다.
왕속에 제사장이 있음을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1-7절에 보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은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 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 같이 예비하였으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대제사장은 피를 갖고 지성소에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가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 역할이 순이라 이름하는 분에게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도 되시고 희생제물도 되십니다.
이런 분이 왕이 되십니다.
그러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가지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운 이유를 아시겠지요.
대제사장 되시는 분이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죄의 포로였던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들에게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면류관을 오히려 어린양에게 돌려 드립니다.
어린양에게 면류관을 돌려 드림으로 말이암아
어린양의 공로를 영원히 찬양하게 됩니다.
마치 면류관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성전에 보관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제사장과 왕의 결합이라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인간도 왕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질 수 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왕되심은 대제사장 되시고
제물 되심으로 만들어진 왕입니다.
이 왕의 면류관은 영원히 속죄함을 받은
자들이 돌려드린 면류관입니다.
스가랴6장15절을 봅시다.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여호와의 전은 고린도 전서4장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가 성전을 만드셨습니까?
화목제물 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스가랴 6장15절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인간도 청종할 인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청종하셨습니다.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피로 성전을 건축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12-18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