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일스가랴8장1-23
1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유다 족속아 ,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축복이 무엇입니까?
3-8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 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방인 가운데서 저주받은 자로 대표 되었던 자들이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축복의 모습이 우리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죠.
그런데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것이 남은 백성의 눈에 기이하다는 사실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 이후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어느 한 경우도 이런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국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본문을 보면 분명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으로 한정 삼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육적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 말씀은 분명 약속의 말씀이요 소망의 말씀이 되겠지요.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발생해야 합니다.
말씀이란 지옥보낼 자들을 반드시 지옥보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6-8절을 봅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 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스가랴에서 하신 약속의 말씀은 육적 이스라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참 이스라엘 즉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를 따로 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에서와 야곱이 다 이스라엘이라고 보여지지만 그 이스라엘 가운데 사랑받는 이스라엘과 미움 받는 이스라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1장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희망적인 말씀입니다.
너무나 기대를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보니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사람 다 빼버립니다.
오직 주님만 계십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주님을 전하는 도구 말입니다.
물론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자랑할 수 가 없습니다.
오직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 오직 주님되신 예수님의 피 능력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무엇이었습니까?
스가랴 선지가가 예언한 그 시대를 가져올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들도 저주받은 자들이 아니라 축복받은 자로, 축복이 되는 자로 되는구라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실망을 가져 오십니다.
요한복음6장을 봅시다.
너무나 잘 아시는 말씀이지요.
물고기 두 마리아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14,15절입니다.
“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 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의 능력은 매력 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즘 날씨가 얼마나 춥습니까?
제가 요즘 공사장에 가 있는데 그곳은 불도 피울수가 없지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맨손으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 중에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 보세요.
임금 삼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 단순한 임금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임금이 아니지요. 자신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임금입니다.
이런 임금이 그립지 않습니까?
자식교육 때문에 머리 아파 하지 않아도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는 자들이 특별이 나쁜 자들이라 그런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야 말로 보통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축복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들은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축복 축복, 평화스러운 삶, 자식새끼 잘 낳고, 잘 커고, 무병 장수하는 세계.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잠자리 걱정을 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 말로 축복의 세계아닙니까?
마태복음5장31-34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래서 머리깍고 산으로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만 구하면 먹을 것 마실것, 입을 것이 해결되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 어떻게 사셨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 사람의 모습이 돌에 맞아 죽는 삶이었습니다.
좀 더 오래 산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헐벗고 굶주리고, 죽음의 위험 등 등, 물론 가끔 배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 축복받은 삶은 아니지요.
마지막에 갇혀 지내는 삶.
갇혀 지내는 삶이 행복하다는 사람 있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라는 것을 전하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감옥을 자처하죠.
완전 정신 나가 사람 아닙니까?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기로는 반드시 말씀대로 이룬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한 바와 정 반대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 버리지요.
왜 그렇습니까?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행복만 꿈꿉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지요.
그러니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지향하는 바를 보아야 하는데 자신의 탐욕을 개입시켜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언제나 자기 합리화, 자기 권력화, 자기 자랑에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이라고 외치지요.
마태복음 19장3-12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이 말은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찌하여 이혼 증거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했습니까?
우리야 시시하게 이 질문이 들릴지 모릅니다마는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세가 누굽니까? 율법을 받은 사람아닙니다.
그런데 모세가 말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상반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모세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이 문제가 되겠지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이혼안된다 하셔놓고 뒤에서는 이혼의 조건을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아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했다는 것이지요.
아내 내어 버리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이 완악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도 음행한 연고일 경우 아내 내어 버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음행할 경우 이혼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보게 되면 호세아 선지자가 누구랑 결혼합니까?
고멜이라는 아주 나쁜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자기 의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지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도망가버립니다.
가정생활은 따분해서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값을 주고 데려 옵니다.
그러니 말씀은 오직 인간이 얼마나 악한자들인가를 들추어내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그렇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네요 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했는지 아시겠지요.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너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떨어지면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지요.
결혼이 문제가 되니 결혼하지 않겠다고 덤벼듭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얼마나 대단해 보입니까?
그런데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말씀을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말씀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됩니까?
그러나 말씀은 항상 활동을 합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에 감사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성도가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죄가 나오지 않고 죄가 나오지 않으면 주님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활동합니다.
자신의 욕망만이 활동하지요.
문젠 욕망으로 시작해서 욕망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으면 여전히 욕망이 활동하지만 십자가로 끝납니다.
욕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긍휼을 입지 못한 자들은 말씀이 오히려 그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역사합니다.
성도는 말씀과 가까이하는 자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실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