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6

푸른 섬 2012. 1. 15. 19:18

사사기 강해 6

드보라, 바락




음성설교

사사기4장1-24

에훗이 죽은 후 삼갈이라는 사사가 등장했습니다.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의미이지요.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600명을 죽였습니다.

삼갈을 통해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

성경을 보면 팔십년 후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우리가 볼 땐 긴 세월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으로 보니 어떻습니까?

시간이 길지 않은 것 같지요.

그렇습니다. 사사기를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에서도 주님의 구원과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삶을 늘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사시기를 보면 우리의 삶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드보라는 어떻게 부르는지 한번 볼까요?

4절입니다.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 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왜 랍비돗의 아내, 그리고 여선지라는 말을 덧붙일까요?

앞서 나온 사사들을 볼까요? 남자 사사들의 경우 어떻게 부릅니까?

누구의 남편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남자 누구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렇게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줌마이기 때문입니다. 아줌마가 사사로 등장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남자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바락이 나옵니다. 드보라가 바락에서 여호와의 명을 전하는 것을 보면 바락이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락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선지 드보라를 통해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 그 무리들 바락 손에 붙인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락의 반응이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왜 드보라와 함께라면 전쟁에 나가겠다고 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순종의 태도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드보라, 당신이 직접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대로 되는지 전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의 반응이 좀 나타납니다.

옷니엘이나 사사 에훗의 등장 때에는 이런 반응이 없었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이 떠오르지요.

가나안 땅을 정탐했는데 정탐꾼들의 보고가 어떠했습니까?

부정적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갈렙만이 능이 이긴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지요.

바락은 여호와께서 붙이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 취합니다.

야엘이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입니다.

여기도 여자가 등장하지요. 헤벨의 아내 야엘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가나안왕 야빈을 진멸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여자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까요?

사사가 등장했다는 자체 만으로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여자 사사의 등장은 이들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바락과 헤벨의 아내 야엘의 대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헤벨은 겐 사람입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입니다. 이런 표현이 성경을 읽는 재미를 줍니다.

모세의 장인은 이방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여선지 드보라와 이방인의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

이 정도 되면 이스라엘의 자존심은 상할대로 상하게 됩니다.

특히 바락의 행동은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바락이라도 여선지 드보라의 말을 듣고 곧장 실행 했다면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구원받는 이스라엘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왜 이런 식으로 구원을 해 주셔야 하느냐 말입니다.

산 넘어 산이지요.

옷니엘을 보아도 그렇고, 왼손잡이 에훗을 보아도 그렇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어떻게 이런 식으로 구원하시느냐 말입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완전히 무시하고 말입니다.

그저께 어떤 책을 보니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을 수 없다나요.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구원해 주셔야 되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받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에 대해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한 말에 대해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님 편이라 생각하고 베드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셔습니다.

듣는 베드로 어떻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갑니까?

우리의 걸음걸음이 누구를 위한 걸음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위한 걸음인가요?

아니지요. 오직 자신의 배를 위한 걸음걸음들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자식에서 많은 재산 물려줄까?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평안하게 살까?

나의 노후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까?

하루하루 나의 삶을 어떻게 하면 즐길까?

예수님 제발 나의 자녀를, 나의 삶을 이렇게 살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주님 제발 저를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사단노릇을 합니다.

십자가 복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우리더러 사단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더러 마귀새끼라 하십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고려해 주시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을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에 힘쓰세요. 말씀을 하루에 두 장은 읽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가르치지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성경 읽은 것, 기도하는 것,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마귀의 자식임을 알지 못해요.

십자가의 피만이 자신들을 구원함을 알지 못해요.

십자가의 피가 쪼끔 필요할 뿐이에요. 그래야 사람들의 자존심이 살지요. 십자가 피만이 다라고하면 인간들의 행함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들이 마귀새끼다, 우리가 사단이다라는 말은 십자가의 피 능력을 높이기 위한 극단적 표현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런 자를 덮어 신 것입니다. 허물과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을 때, 더 이상 허물이 없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려면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겠지요.

자 이제 나는 허물없다. 죄 없다. 그러니 나는 의인이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피는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저를 위해 간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자신이 알아서 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없고, 의로운데 , 예수님과 똑 같은데 왜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까? 왜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사사기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유는 십자가의 피능력이 어떻게 역사하시는 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은 죄악의 깊이를 더욱더 들추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마다 살아가는 순간마다 십자가의 피만을 의지하고 자랑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바락이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여러분 생각에 바락이 어떤 사람인것 같습니까?

믿음의 사람 같습니까 아닙니까?

꽁무니를 뺀 사람 아닙니까? 여선지 드보라가 가야 자신도 싸움에 나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바락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것도 믿음의 선진으로 말입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드보라가 나오지 않고 바락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11장32절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바락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일선상에 놓여 있어요. 에녹이 누군지 우리 어린아이들은 잘 모르지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과 365년 동안 동행하다가 하나님께로 죽지 않고 간 사람이에요.

바락이 지금 이런 에녹과 같은 레벨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락이 아브라함과 나란히 있어요.

이게 이해됩니까?

바락이 한 게 뭐에요.

꽁무니 빼다가 드보라 따라 전쟁에 나가 가나안왕 야빈을 진멸한 자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실제 싸움은 바락이 하지만 누구의 손에 의해 승리합니까?

드보라, 종결자는 야엘.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이런 바락을 믿음의 선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살게 될 삶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지요.

바락과 같이 여선지 드보라 뒤에서 꽁무니 빼고, 전쟁에 앞장서 싸움만 하고 영광도 얻지 못하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야 말로 믿음의 선진이라는 말입니다.

우린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선진이라면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사사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본받을 것과 본받지 말 것을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지 말고 사사처럼 살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믿음 없는 자의 생각입니다.

믿음의 사람 바락을 보면 주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여선지 드보라를 펼쳐 보여 준자가 바락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어렵지요.

여선지 드보라를 누가 만드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선지 드보라를 세우셨지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바락 같은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사용됨이 바로 믿음의 선진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죄대로 제대로 드러나면서.

주님의 구원의 일에 참예된 자란 말입니다.

여기 어린이들이 있는데, 사사들을 보면서 본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사사들은 본받을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신 흔적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도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집니다. 죄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을 펼칠 때 우리들은 꿈을 꿉니다.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씀, 나의 꿈을 이루어주는 말씀이 펼쳐지기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그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죄가 제대로 노출됩니다.

성도는 죄를 제대로 노출하면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며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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