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10

푸른 섬 2012. 2. 19. 14:18

사사기 강해 10

기드온의 본모습





음성

사사기6장33-40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지난주 우리들이 보았던 본문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앞선 본문을 보면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견고한 성위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

칠년 동안의 미디안 압제는 곧 자신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기간입니다.

이 죄악을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말씀하시기 위해 칠년 된 수소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러한 일을 당당하게 대낮에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워서 밤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온 성읍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섬은 오직 자기 자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바알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혹 저 우상들이 우리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까라는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생각을 누가 했습니까?

기드온이 속한 그 지역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요아스로 인해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때에라는 표현을 해 놓았지요.

너무 잘 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당황할까요?

기드온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하필이면 지금, 바알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렸을 때 저들이 공격해 오느냐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생각 많이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일이 닥칠까 하여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길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을 불태워 버렸으니 이제 복이 아니라 저주가 내릴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생각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쏟아 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짐으로 더욱더 분명해 졌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씀을 통해, 모든 인간들은 이런 구조, 즉 자신들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에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라지지요.

이사야44장9-17절을 한번 봅시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 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보라 그와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의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쎈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 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들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제가 보고자 하는 부분이 17절입니다.

사실 한절만 읽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상의 실체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우상을 왜 만들어 경배한다고 합니까?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드온이 무엇을 파괴 했습니까?

우상을 파괴해 버렸지요.

그러니 자신들의 구원자, 그래도 지금까지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사람들로부터 지켜주던 바알과 아세라 신이었습니다. 지금 그 신들이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을 구원해 줄 신이 없습니다.

그러자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의 연합군이 공격해 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봐라 봐라. 결국 이 모든 것이 기드온 때문이다. 바알이 전쟁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던 바알신이 우리를 버렸다. 이런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불자마다 아비에셀이 기드온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비에셀의 뜻은 도움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값을 좀 했습니다.

나팔소리에 아비에셀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영이 임한 상황에서 기대할 수 없었든 일들이 펼쳐집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기드온이 또한 사자들을 온 므낫세, 아셀, 스블론과 납달리에 보냈습니다.

사자들을 보내자 말자 이들은 기드온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이들 지파들이 이스르엘 가까이에 살던 지파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드온의 부름에 당연히 응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여기에 우선된 것이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므낫세 지파 기드온의 요구에 부응했다고 볼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의 활동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없는 자가 이 말씀을 보면 어떨까요? 그야 적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 위험을 서로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300명의 군사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사람의 눈에는 그냥 사람들의 활동같이 보이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결코 그들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전쟁을 원인제공하시고 전쟁할 군사들을 모으시고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입니다.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면 그 다음 어떻게 행동할까요?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살펴 볼까요?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성경번역이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기드온이 여쭙는 내용을 보면 여쭙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보입니까?

요구하는 내용아닙니까?

조건을 거는 내용아닙니까?

36절 하반절에서 37절입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두 말 하지 않으시고 기드온의 조건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한번 더 요구합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리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밤에 또 그대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의 행동이 영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래 그래 내가 반드시 너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십니까?

그렇게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인 이부분도 있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의 행동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왜 기드온을 이렇게 행동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데 있어서 인간은 항상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성경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을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통해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예수님을 통해 밝혀진 인간들의 본 모습은 아브라함이든, 야곱이든, 이삭이든 모두가 다 하나님을 죽인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림이 없이는 이들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렸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너무나 기뻐한 것입니다.

기드온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드온도 여전히 첫째 아담안에 있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기드온에게 그러한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여러 유명한 인물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바닥을 항상 보여 주십니다. 그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그들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기드온을 높이려는 인간들의 본성을 주님께서 아시고 오늘본문말씀을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본문들을 보면서 기드온을 흉내내려고 합니다.

주님 저를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시려면 기드온에게 보여준 그러한 증거를 저에게도 보여 주옵소서.

제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옵소서. 저는 기드온 처럼 두 번은 바라지 않습니다. 한 번만 보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 하라고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샘플입니다.

요한복음16장7-1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힁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만 받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생각을 합니까?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래요 이 말은 맞아요. 그런데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말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자만이 무엇을 받습니까?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미있게 표현해 놓으셨습니다.

9절에서는 그들, 10절에서는 너희, 11절에서는 이 세상 임금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이렇게 각각 다르게 대상을 말씀하셨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9절에서는 그들은 세상을 말씀하신다고 볼수 있지요. 10절은 너희들, 즉 제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절은 이 세상 임금, 누굽니까? 마귀지요.

그런데 성령을 누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너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자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택함받은 자만 책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택함받지 못한자는 책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책망이 없습니다.

문제는 성도입니다. 성령받았으니 나 좋아요. 이런 성도 가짜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은 자임을 늘 책망받는 자입니다.

책망 받는 자라는 말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이 죄를 깨닫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고 책망 받을 수 있는 자는 성도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 즉 책망이 없는 자는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성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의인도 아니고 마귀의 종이었음이 드러나는 자가 성도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지 않습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성령을 받으면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의인입니다.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더 이상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전하는 삶이 아닙니다. 기드온을 보면 여호와의 영의 역할은 오직 여호와만이 구원하시니 기드온이나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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