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9

푸른 섬 2012. 2. 13. 13:35

사사기 강해9

큰 용사 기드온과 여호와 살롬





음성설교

사사기6장11-3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났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하신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신나는 일이 아닐까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내 형편이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드온이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딱 여기 있는 우리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행한 것은 생각지 않고 모든 책임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돌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애굽에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이적이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왜 우리를,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셨습니까?

벼루고 벼루어서 하는 말 같지 않습니까?

그동안 속에 담아 두었던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를 보자 말자 퍼 붙습니다.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에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형편이 저주받은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주 받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생각해 내는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이러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께 핵전쟁이 일어났어요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어린이 동화책인데 독일 사람이 썼어요.

핵전쟁이 일어나니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방사능 때문에 죽고 시간이 지나니 전염병 때문에 죽고, 추위 때문에 죽고, 굶주림 때문에 죽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도 손발이 없고, 코도 없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극한의 상황이지요. 내가 굶어 죽고, 내가 병들어 죽고, 내가 추워 죽는 상황에서 어떻게 남을 도와주느냐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믿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소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 같지요. 물론 그들도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누가 이런 소리를 합니까?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 오셨을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큰 용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용사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런 참혹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적은 운운하지요.

딱 우리 마음 아닙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면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십니까?

왜 나의 가정은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왜 나의 가족이 병이 들어야 합니까?

왜 나는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합니까?

왜 나의 자식은 공부를 잘 못합니까?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행하신 그런 기적은 다 어디 갔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기도를 보면 불만을 쏟아내는 기도를 합니다.

대학 붙게 해 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교인수 많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취직 잘 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나요?

예수님이 살아계시긴 계십니까?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지만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나요? 이런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이런 상황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불만과 원망을 쏟아 내는 자들이 우리 인간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오시면 예수님께 따질 인간들 한 둘이 아니겠지요.

기드온이 따졌다는 말은 곧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따진다는 말입니다.

왜 세상을 만드셨나요.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나요.

왜 이런 험악한 꼴을 보게 하시나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드온을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또 기분 좋아 합니다.

그래그래, 나는 기드온 같이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자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나를 이런 기드온처럼 사용하실 거야. 이렇게 또 자신을 붕 띄어 봅니다.

이런 어려움을 , 참혹함을 이기게 하실 거야 그러면서 다시 힘이 쏟지요.

자기 혼자 발악을 합니다. 완전 정신병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작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자기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백날 설교 하고 성경 말씀대로 줄줄 읽어도 관심은 한가지뿐입니다.

그래 나도 기드온처럼 사용될꺼야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기드온 처럼 이라는 말은 승리자가 될꺼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드온처럼 사용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입장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성경을 해석하지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의 성경해석은 어느 본문을 해석해도 한가지입니다. 자기 확장하기. 자기 자리 만들기입니다.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자기 자리 만들기에 나섭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기드온처럼 사용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나에게도 나타나셔서 확신도 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를 믿습니다라고 하지요.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보내신다고 하니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왜 이런 말 하는지 알겠습니까?

사실 그렇지만 기드온을 통해 구원하신다고 하셨지만 뭔가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이 정도에 물러날 기드온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되시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표징이 무엇일까요? 이적 아닙니까?

뭔가 놀라운 이적을 보여 주시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물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러분 말씀 들었으면 그 말씀 듣고 순종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개혁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순종 아닙니까?

알미니안 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해야지 뭐가 그리 말이 많습니까?

기드온이 말입니다.

염소새끼 하나, 가루 한 에바로 만든 무교전병,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이에 담아 약속된 장소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명하셨습니다.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르되 슬프도 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왜 이제야 이런 말을 할까요?

이전까지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했다면 당장 엎드려 이런 소리를 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지요.

그러니 기드온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로 보이지 않았고 단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누군가로 생각했지요.

그러니 자기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 국을 살라 버린 상황에서야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았습니다.

기드온도 들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제야 안절부절 못하면서 슬프도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여호와를 제대로 만난 모습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과 앞서 말씀의 차이점이 있지요.

조금 전에는 여호와의 사자로 말씀하셨고 이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입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기드온은 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살려 주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합니다.

여호와 살롬, 살롬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평안을 비는 뜻으로 살롬이라고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평안이 어떤 평안입니까?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까불었다. 까불다가 죽어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 이런 차원에서 여호와 살롬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입니다.

말씀이 임할 때 우리의 죄는 말씀 속에서 격렬히 드러나면서 죽어야 되는 자임이 발각되어지면서, 죽여야 마땅하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냥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죄가 드러나지요. 기드온은 죄를 몰라요. 그러니 여호와의 사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죽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이 지옥가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희생 제물로 사용하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해주시는 구원방식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평안은 바로 이런 평안입니다.

그러니 세상과 주는 평안과는 너무나 다른 평안이지요.

이제 기드온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물론 여호와의 말씀이 먼저 떨어집니다.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짝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 지니라

기드온 처음으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기드온 아버지 집에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있다는 말은 기드온도 여기에 어떠했다는 말이 됩니까? 동조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 기드온 꼬락서니 볼 것 없다 이 말입니다.

많은 성읍 사람들 집 중 기드온 집에 바알과 아세라 상이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앞잡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기드온 집안이.

그런데 이제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명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두려웠습니다. 집안사람들과 성읍사람들이.

사실 그렇지요. 그래서 기드온은 밤에 몰래 여호와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 나는 두렵지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내가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린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신앙인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왜 불신앙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누구처럼 되고픈 욕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참 성도라면 이런 것에 관심 없습니다. 두려운 대로 전합니다. 아세라가 나무로 만들어 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찍은 나무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명대로 행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성읍사람들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런 일을 행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자의 앞잡이 아버지 요아스가 돌변해 버렸습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요아스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우리생각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런 것 같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 때문입니다.

요아스가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바알과 아세라도 자기 집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버립니다. 얼마나 자기를 사랑합니까?

이제 기드온 별명이 여룹바알이 됩니다. 바알에게 대항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바알 단이 파괴되고 아세라 상이 찍혀 불에 탄 상황에서도 회개할 마음 없습니다.

오히려 왜 우리들의 신을 파괴했느냐 , 그래서 너는 죽어야 되라고 합니다.

요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아들 기드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자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아들 기드온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장사 했다고 볼 수 있지요. 돈벌이가 엄청 되었겠지요. 요즘도 그렇지요.

성경이 좀 깔끔하지가 못해요.

이정도 되었으면 이스라엘이 회개 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겼다. 이렇게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정리를 해 주지 않아요.

우리 마음에 들지 않지요.

정리 해주면 우리도 따라하면 되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깔끔한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깔끔한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을 통해 구원받는 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다. 개판입니다. 엉망입니다.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니 구원받는 자는 구원받을 자격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지요.

자격 없어요. 죽어야 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하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구원받습니다.

마태복음8장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문둥병자는 율법에 의하면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그가 한 일이 없습니다. 아니. 그가 한 일이 있지요.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그는 전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하시기 위해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성도의 자리가 이런 자리입니다. 문둥병자의 자리. 우상숭배자의 자리.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깨끗케 하셔서 구원하심을 전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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