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11

푸른 섬 2012. 2. 26. 13:08

일 : 12-02-26 12:59
사사기 강해 11
 
조회 : 1

300명



음성설교

사사기7장1-23

본문 내용은 미디안 과의 전쟁입니다.

전쟁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장군, 군인 수, 무기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요.

뿐만 아니라 전략도 중요하겠지요.

전쟁 역사 중에 군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들이 상당히 많지요.

오늘 본문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본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드디어 기드온 즉 여룹바알을 통해 미디안을 치십니다.

7장1절에 여룹바알이라는 기드온의 별명을 먼저 사용한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기드온이 지금부터 무슨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상과의 전쟁을 한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의 이름 속에는 바알신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바알 단을 헐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입니다. 바알이 다툴 것이다. 즉 바알이 직접 기드온과 다투어 보라는 것이지요. 바알이 기드온과 다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드온이 미디안 전쟁에 앞장 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 말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 그렇게 앞장서서 죽이려고 하든 자들이 가장 먼저 기드온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을 따를 때 입을 꾹 다물고 따랐습니다. 자신들은 누구 편이었습니까? 바알 편이었지요.

그런데 누굴 따라 전쟁에 나섭니까? 여룹바알을 따라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니 이미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들의 입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꾹 다물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떤 자들입니까?

인간이 어떤 인간입니다.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오는 자들 아닙니까?

여룹 바알, 즉 기드온의 동원령에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가 따랐습니다. 물론 므낫세 지파가운데 아비에셀, 즉 기드온이 속한 집안이 제일 먼저 나섰습니다.

하롯 샘에 이들이 진을 쳤고, 모레산 앞 돌짜기에 미디안이 진을 쳤습니다. 미디안이 북쪽 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롯 샘의 뜻은 두려움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이 위치한 곳이 두려움의 샘에 위치해 있습니다.

모레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롯 샘곁에 진을 치게 하셨을까요?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하롯 샘이라는 지명을 통해 다르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비록 이들이 기꺼이 전쟁에 동참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좇은 백성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시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즉 전쟁 승리의 공을 자기에게 돌려 자신들이 영광을 취할까 하여 많은 무리에게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숫자가 3만 2천명입니다.

그렇다면 미디안 군대의 숫자는 어느 정도 일까요?

사사기6장3,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 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 근거하여 보면 아무튼 이스라엘 군대가 이들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장12절을 보면 미디안, 아말렉, 동방의 모든 사람이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 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싸워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압니까?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운다면 이길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수작업을 하십니다.

너무 많다. 즉 너희들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우리가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소리를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먼저 누구를 돌려 보냅니까?

두려워 떠는 자들입니다. 하롯 샘이라는 이름이 이름값을 하지요.

3만2천명이 전쟁하러 나왔는데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니 2만2천명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나머지 만 명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물가로 내려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와 함께 전쟁에 갈 사람을 추려 내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추리는가?

물을 먹을 때 먹는 방법을 두고 추려냅니다.

미리 결정을 해 놓으셨습니다.

개같이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와 그렇지 않고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손으로 물을 퍼서 핥아 먹는 자와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자를 따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도 의미를 두자면 무릎을 꿇는 자는 전쟁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고, 손에 물을 떠서 핥아 먹는 자는 전쟁할 준비가 된 자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의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는 것을 문제 삼으십니까?

그렇다면 방금 이런 식의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뜻과는 다른 뜻이지요.

목사들이 이 부분을 설교할 때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해요.

여호와 하나님 전쟁에 나가는 자는 전쟁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300명에 뽑힌다.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맞아요?

딱 여호와의 원수이지요. 바알적입니다.

지금 300명이 사람의 능력을 부정하는 숫자입니다. 사람에게는 어떠한 공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런데 방금과 같이 전쟁하는 자의 , 군인다운 모습이라고 해석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해석하라고 이 본문을 주셨습니다. 그래야 바알에 서는 자들을 가려 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전쟁할 군인의 수는 삼백 명입니다. 기드온까지 합치면 삼백일명입니까?

그건 별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셨습니다.(7)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은 인원은 삼백 명.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이야 신난다. 내가 삼백 명에 뽑혔다. 이런 소리 나올까요?

이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의 상상입니다.

9-11절을 봅시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만일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 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으로 내려간즉”

기드온 조차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기드온을 따르는 자들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드온도 부정당해야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만일 이라는 조건을 붙여서 말씀하셨지만 기드온도 돌아간 자들과 다르지 않는 자임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을 눈곱만큼도 인간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십니다.

기드온이 적진에 들어가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3절입니다.

한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라는 꿈입니다.

그러자 그 동무가 꿈을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기드온이 갔을 때 하필 그 때 이런 꿈 이야기와 해몽이야기가 오간 것입니다.

전쟁승리에 기드온이, 삼백 명이 들어갈 지라가 없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고 드디어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다고 하면서 전쟁에 나섭니다.

그런데 전쟁 방식이 희한한 방식입니다.

전쟁하려면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무기지요.

그런데 무기는 없습니다. 이들이 든 것은 나팔,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입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적을 죽이겠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적을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기도 없이 나팔, 빈 항아리, 횃불.

또 우리 같으면 이런 생각하겠지요. 나팔 불면, 항아리를 집어 던지거나 불을 내어 적들을 죽인다고 말입니다.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20절입니다.

“세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 오른 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이게 삼백 명이 한 일입니다.

적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대단한 작전이지요.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나오겠지요. 그래 주님의 일은 이렇게 지혜롭게 일을 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어떻게 읽은 것입니까?

영광을 공로를 여호와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하기 위해 삼백 명을 뽑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여기에 왜 인간의 전략이 나옵니까?

그러니 성경 말씀이 얼마나 오묘한지 모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국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략이 나온다면 참으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사야42장8절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홀로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2장을 좀 더 살펴봅시다.

6,7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에 이어서 8절 말씀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1장5절에 세례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 예수님 때문에 실족할까요? 십자가 지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 말로 기적, 기적, 기적 아닙니까?

죽으시면 안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 말씀은 곧 어떤 인간도, 인간의 행함도, 다른 그 무엇도 하나님께 영광돌릴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도무지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죄수보다 더 인기가 없습니다.

채찍질 당합니다.

옷 하나 없습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조롱거리로 사용되어집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무엇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 아들을 죽이는 것밖에 없음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인간들이 여호와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커녕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너희들이 취하려고 하는 자들임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13장4-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에 관심을 둡니다.

즉 내가 믿음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안 보이나요. 그러면 감사한 일이지요.

성도의 삶이란 약한 자로 버리운 자처럼 살아갑니다.

5절에서 버리운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7절에서는 성도가 사람들이 보기엔 버리운자 처럼 살아감을 말씀합니다.

5절을 부정적으로 사용했고, 7절에서는 긍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실제 성도의 삶이란 약한 자로, 버리운 자처럼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들의 행함이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늘 죄인으로 남아 있지요. 그러니 진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약한 자로 보이고 버린 받은 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의 전쟁이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드온에게, 삼백 명에게 영광이 없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케 하셨다라는 것만 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행위 즉, 기도, 전도, 봉사, 헌신을 주장하는 자들이 보기에 성도는 정말 믿지 않는 자 같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 믿음 없는 자들로 낙인찍혀 살아가게 됩니다.

저들은 큰 소리 칩니다. 큰 소리 치니 자신의 편들이 생기지요. 이 땅에서 큰 소리 치고, 내세울 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붙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큰 소리 칩니다. 십자가뿐이라고. 그러니 사람이 없어요.

바울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복이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삼백 명에 들어간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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