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13

푸른 섬 2012. 3. 11. 13:05

사사기 강해 13

숙곳, 기드온, 이스라엘, 에봇




음성설교


사사기8장4-28

기드온과 삼백 명이 요단강에 도착하여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들은 지금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합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우리들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 피곤할까요 피곤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힘들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지칠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나를 피곤하게도 하지 않으시고, 지치지 않게 하시는 주님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안 되지요. 그러나 얼마나 열심히 기도합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지칠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어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를 진멸하게 하셔야 하지 않는가?

이게 우리들의 생각 아닙니까?

제가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지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깔끔한 것을 원해요.

너들너들한 조각들은 없었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부정적인 것들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의 죄악이나 인간들의 나약함들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일일 시키시고 그런 분의 일을 행할 때 인간적인 것, 부정적인 것, 죄악된 것들은 하나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설 공주가 거짓말도 하도, 남도 속이고 하면 백설 공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설 공주답습니까 답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느 누가 백설 공주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가 깔끔하지 못합니다.

굶어도, 아무리 싸워도 지치지 않고 힘이 나야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다운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배가 고픕니다. 피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좀 심하시지 않습니까?

일을 시켰으면 배고프지 않게, 피곤하지 않게 하셔야 하는데..

이게 우리 죄인들의 생각입니다.

자 이런 상황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이 지치고 피곤하고 배곤픈 상황을 말입니다. 제가 이런 상황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야 전쟁하니 당연히 배고 고프고 피곤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요?

요단강에 이르기 전에 먹을 것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드실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보려고 하는 본문의 핵심사건입니다.

이들이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여 요단을 건너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숙곳에는 누가 살까요?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볼 때 친한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맞아요. 이들은 갓 지파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자, 그런데 이들이 미디안전쟁에 참여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기드온이 부르지 않았지요.

그 이유가 나와요. 에브라임지파를 나중에 부른 이유는 에브라임이 갖고 있는 죄를 꺼집어 내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갓지파는 더 심합니다.

전쟁에 부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갓 지파가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갓지파가 거주하는 쪽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갓 지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전쟁에 나서는 것입니까? 싸움에 나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오직 기드온과 삼백명에게 먹을 것을 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지금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고 있다고 말하니 숙곳의 방백들, 즉 지도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6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들은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세바와 살문나를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누구를 비웃습니까? 기드온을 비웃고 있습니다.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앞서 일어난 사건을 모를까요?

알고 있어요. 삼백 명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방식대로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을 보니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10절에 보면 12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만 오천 명이 남아 있습니다.

갓 지파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숫자가 보입니다. 군사력이 보입니다.

그러니 삼백 명 너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저들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8절을 보면 브누엘 사람들도 똑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도 역시 갓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일로 인해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7절을 봅시다.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9절입니다.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지금 기드온은 여전히 여호와 께서 미디안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자신들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드온과 삼백명은 먹을 것을 먹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나 피곤한데로 전쟁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들의 피곤함이 갓지파의 악함을 드러냈다는 사실입니다.

갓 지파는 이스라엘입니다 마는 기드온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곧 이들은 미디안 편이라는 말입니다.

피곤해 있는 기드온과 삼백 명을 도와주지 않고 이들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기드온과 삼백 명에 손에 붙이셨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아 돌아오는 중에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 칠 명을 알아 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붙잡아 세바와 살문나가 기드온의 손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보여 주면서 이들이 이전에 비웃고 조롱한 말을 다시 말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둡니까 두지 않습니까?

16,17절을 봅시다.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징벌하고 죽였습니다.

사실 징벌하고 죽이는 대상이 누구여야 합니까?

지금 누구랑 전쟁하고 있습니까?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과 전쟁하고 있지요.

그런데 누가 징벌당하고 누가 죽습니까? 갓 지파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이 누구를 죽인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죽였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에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맞지 않지요.

적어도 내 형제, 자매, 부모님들은 죽이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신문하고 죽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바와 살문나가 너와 같아서 하나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기드온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엿으니라

지금 기드온이 무슨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전쟁을 하고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 버립니까?

전쟁의 마지막 정점이 자기 원수 갚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맏아들 여델에게 이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칼도 뽑지 못합니다.

왜 이 구절이 들어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삼백 명 중에 누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기드온의 맏아들 여델. 문제는 칼도 뽑지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이시는 전쟁이었기에 승리했고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전쟁을 기드온은 자신의 개인전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들 여델이 죽이지 못하자 세바와 살문나의 입을 통해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게 하십니다.

이유는 이 전쟁이 너희 원수 갚는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전쟁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기드온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몰라요.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삼백 명 볼 것 없습니다. 실컷 전쟁해 놓고 결국 전쟁의 공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기드온에게 돌립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구원한 기드온과 아들,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드온만이 눈에 보입니다.

21절을 보면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졌습니다.

이미 기드온의 마음속에는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는 요청이 들어 온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기드온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너희들을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합니다.

얼마나 믿음 있는 말을 합니까? 그런 것 같지요?

그런데, 기드온이 이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탈취한 금으로 된 귀고리, 초승달 장식, 패물, 왕들 의복에 있던 것, 낙타 목에 들렀던 사슬을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이유는 에봇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것을 말해놓고 에봇은 왜 만듭니까?

27절 보세요.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함으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에봇은 원래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성막에 있어야 하지요.

대제사장 아론계열쪽에 있어야 하지요.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입니다. 레위지파도 아닙니다. 대제사장 계열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에봇을 만들고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28절을 봅시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기드온과 갓, 에브라임, 모두가 다 엉망입니다.

말씀의 기준에 의하면 이들은 평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평온했습니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자 이렇게 해서 설교 끝나면 좋겠지요.

이렇게 되면 유대교가 됩니다.

자 다시 처음으로 가봅시다.

왜 숙곳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습니까?

왜 브누엘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습니까?

왜 기드온은 여호와 전쟁을 개인원수갚기로 바꾸어 버립니까?

왜 이스라엘이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까?

왜 기드온은 여호와가 너희를 다스린다 해 놓고 전리품을 갖고 에봇을 만듭니다.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에봇을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둡니까?

과연 이들이 평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온을 누렸습니까?

기드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뭐길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기드온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평온을 누립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깨끗게 해 주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의 삶이 기드온과 그 당시 갓지파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기드온, 바로 십자가 지신 주님이 성도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평안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평안은 이 땅에서 정 반대로 다가 옵니다.

갓 지파가 그랬던 것처럼 조롱과 비웃음으로 , 미움과 죽임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10장34-39절을 봅시다.

“내가 세상이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드온과 삼백 명의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속으로 결심하지 않습니까?

그래 난 숙곳 사람이나 브누엘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지. 기드온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되지 않아야지. 에봇을 만들이 않아야지. 이런 결심을 하지 않습니까?

말씀은 결심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방금 읽은 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발 붙인 곳은 언제는 싸움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상대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상대는 자기 자신을 믿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믿는 자기 자신을 믿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우린 죄인이구나, 우린 이런 인간이구나 주님의 십자가 피능력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요. 그러나 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결심하고 다짐하고 다짐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피만 의지하고, 성도 아닌자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피만 의지하니 당연히 예수님의 피만 전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의 행위를 부정해 버립니다.

십자가의 피를 전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어떤 행위도 죄라고 규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형제라도, 부모라도 원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나, 형제로부터도 조롱과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꼭 이렇게 말합니다. 네 행위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네 행위의 완벽함을, 예수 믿는 증거를 보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성령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 십자가의 피능력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물을 내어 놓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핍박을 받습니다. 미움을 당합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이 마귀에게 속했음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이 왜 이렇게 더럽게, 죄악들이 가득차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 본문에서 뽑아냅니다. 본받을 것, 자신들이 행할 것.

그러나 본문을 제대로 보면 인간의 죄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긍휼, 십자가 사랑이 철철 흘러넘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인 성도들이 이 십자가 사랑만을 전하게 하십니다. 철저하게 성도를 부정시키시면서.

그러니 피곤하고, 지치고, 미움 받고, 조롱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성도는 지금도 기드온 전쟁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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