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 1장5-7

푸른 섬 2012. 10. 14. 20:14

로마서강해 4 1장5-7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음성설교

로마서1장5-7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왔습니다.

천국이 지겹다. 내 욕망대로 할 수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삶이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이 드라마엔 옥황상제도 나오고 염라대왕도 나와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도 땅의 일을 다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풀어낸다는 결론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옥황상제의 예정론도 나와요.

제가 왜 드라마 이야기를 설교 초반에 끄집어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믿는 예수님, 성경말씀이라는 것이 결국 이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어 예정론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신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 세상은 돌아간다고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땅의 모든 일은 사람이 풀어야 하늘이 원하는 바대로 풀려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풀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끌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합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인정을 해요. 믿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를 어디에서 알 수 있는고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 주장에서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의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어 버리는 주장을 해요. 하나님 100프로, 사람 100프로, 이렇게 설명도 하고.

이런 사상은 무당이 나오고 옥황상제가 나오고 염라대왕이 나오고 귀신이 나오는 드라마에서도 다 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무당을 앞장세우고 귀신을 앞장세우면서 더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욕망입니다.

천상의 존재라도 욕망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여러분, 많은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천국에 가면 뭘 할까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천국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씀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 즉 자신들의 욕망을 반영한 천국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많은 봉사를 하면 천국에서 어리어리한 집을 받는다고 가르쳐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순교하면 다른 사람과 차등된 면류관을 받는데요.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 땅에서나 필요하고 이 땅에서나 차별이 되는 내용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천국은 이 땅과 전혀 다르지 않는 차별된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누가 수고를 많이 하느냐에 따라 성과급이 지급되는 천국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어떻게 됩니까?

죽임당한 어린양을 영원히 찬양하는 삶이 천국의 삶인데 인간들은 이런 천국 싫어합니다.

천국 가서도 못가본 우주여행하고 싶고, 천국 가서도 못 가본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 보고 싶고, 천국 가서도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무당을 앞장세우고, 귀신을 앞장세우고, 옥황상제, 염라대왕을 앞장세우는 드라마 작가와 똑 같은 수준에 목사들이 있어요.

목사들이 있다고 하니 목사만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도 똑 같은 자들이지요. 교인들도 이런 천국을 꿈꾸니 당연히 그 목사의 말에 아멘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욕망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입니다.

어저께 신문을 보니 욕망제거주사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사를 보니 어떤 예술가가 한국 돈으로 천몇백만원을 들여 만든 예술 작품이랍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욕망을 제거하려고 해도 욕망은 제거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도에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도의 부름이 이와는 완전히 극을 이루는 부름입니다.

5절을 보면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리고 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땅에 모든 인간들은 육신에 매여 자신의 욕망대로, 죄에 팔여, 죄 아래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들이 만들어 졌습니다.

아들, 아들 말씀드렸지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영으로는 죽은 자들의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모시고 사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지금 로마서를 읽게 되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로마에 사는 사람들이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다.

5절에 보면 나와 있지요?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라는 말씀이 있지요?

지금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인데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앞서 3,4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말씀의 의미를 알까요 모를까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성령을 받은 자들이지요. 성령을 받았다면 말씀이 이들 마음 판에 새겨졌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지금 사도바울을 통해 로마서를 받고 읽고 들음으로 이들이 성령 받은 증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왜 3절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는 표현을 썼는지 아시겠지요?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다윗의 혈통과 별로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혈통을 사로잡아 간 자가 누굽니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왕이잖아요.

바벨론은 이방나라의 대표주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그 본색이 들통 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감으로 말미암아 이방나라 모두가 짐승의 나라임이 들통 나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들도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라는 말씀 속에 다윗의 혈통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입니까?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왕이 합세해서 죽이지요.

사도행전4장27,28절을 보면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방인이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합세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을 주님께서는 늘 현재화 시키고 계십니다.

그것을 지금 로마에 있는 이방인인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게 하십니다.

이미 성령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마음속에서 속속 피어나고 있겠지요.

자 그러면 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나쁜 과거는 지우고 싶잖아요.

설교 서론 드라마에 보면 기억도 지우는 능력을 귀신이 갖고 있어요.

우리도 그런 능력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경말씀은 성도들을 항상 십자가에 못 박는 현장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말씀도 그렇잖아요.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과거로 돌려 버릴까요?

이것을 과거로 돌려 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 이상 소용없어집니다.

그러면 무엇만 있으면 됩니까? 성령만 있으면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성령께서는 예수님만을 전합니다. 어떤 예수님, 십자가를 갖고 예수님을 전하는 분이 성령이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도 알지 못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이천년전 사건으로 돌려 버릴려고 해요.

이렇게 하면 누구에게 유리할까요? 이제 죄가 용서 받았으니 열심히 살 일만 남았지요. 누가 삽니까?

구원받은 자신이 살지요.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살까요?

말로는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말을 하지만 십자가를 이미 과거지사로 돌린 이상 자신의 삶의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헌금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들의 간증, 권사, 집사, 장로들의 간증이 모두가다 이런 것이지요. 이들에게서 십자가 복음만 전파되는 것 봤습니까?

그런 사람 있으면 성도입니다. 진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가, 목사들이 그런 사람을 부를까요? 부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체가 인간이 되어야 교인들을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주체가 십자가 지신 주님이 되어 버리면 목사든 누구든 다 죄인으로 규정받고 모든 것은 주님의 공로로만 돌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 우리인간이 할 것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누가 전도하고, 누가 기도하고, 누가 교회 청소하고, 누가 헌금하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처음부터 믿음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즉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공로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사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지난번 설교시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무슨 세미나들을 가보고 들어 보면 십자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나오는 것은 사람의 흔적들, 죄덩어리가 점점 얼마나 커졌는가를 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많은 목사들은 그런 이야기가 좋아요. 십자가 복음은 나의 손을 떼게 하십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주님이 다 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복음만 전할 뿐이지요. 어떠어떠한 기술, 방법을 말할 수가 없어요. 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조리 부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그의 이름, 즉 아들 되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믿어 순종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만들어 진 것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아들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목사라면 누구나 다 말합니다.

그러나 말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될까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것 말하는 것을 보게 되면 누구의 이름을 위해 그 인생이 살려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로마사람들, 이들은 권력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권력, 요즘으로 말하면 미국권력, 아니면 중국권력, 거기에 소속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갔을까요?

당연히 권력, 돈을 위해, 쾌락을 위해 살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로는 아들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쾌락을 위해 사는 자들이었지요.

이들은 마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의 이름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셔서 복음을 듣게 하셔서, 성령으로 이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이제 마귀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렸지요. 마귀종노릇하다고,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런 자를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사랑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 받았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아갑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 있음을 더욱더 높이기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소유물인 성도입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위해 살려지는 인생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천국에서 영원히 죽임당한 어린양을 찬양해도 지겹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 항상 십자가만 보이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용되어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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